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1999년, 미국의 SF 액션 영화, “메트릭스”가 개봉했습니다. 그 당시, 이 영화는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와 화제를 끌었습니다. 저도 이 영화를 몇 차례 보았는데,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하고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장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화 주인공인 레오가, 파란 약과 빨간 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모습입니다.
즉,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익숙한 가상 세계에서 앞으로도 안전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빨간 약을 먹으면, 불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진실의 세계와 마주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이러한 갈림길에 서 있다라면,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 장면이 지금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는 본질적 질문은, 단순한 정보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관점에 대한 문제요 선택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지만, 여전히 세상이 주는 “파란 약”에 취해, 세상의 논리와 가치관으로 복음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고린도전서 속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에게 “빨간 약”, 즉 성령의 빛을 통해, 진실을 보라고 촉구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은 단순히 우리의 성경 지식을 쌓는 시간이 아닌, 우리의 인식이 새롭게 바뀌고 열리는 패러다임의 변화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어떠한 시각과 관점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우리는 십자가 중심의 복음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해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고린도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화려한 언변과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철학적 담론에 열광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자신이 가진 지적 능력으로 이들을 압도하려 했다면, 그는 당대 최고의 학문적 배경을 동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히려 그 당시 문화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것은 아무런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같은 사도 바울의 선언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로마 사회에서 대표적 저주와 실패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관점과 지혜로 볼 때,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전도 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학문적 배경과 지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왜 십자가만 붙들고 있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해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하려고 할 때, 대단히 논리적이고, 완벽한 지식을 갖추어, 상대방을 압도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되게 하려 하였다.”
바로, 우리의 믿음은, 논리의 결과로 얻어지는 산물이 아닌,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께서 우리 죄인들에게 먼저 찾아와,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위한 구원 사건”으로 믿어지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혹시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설득과 논리로만 이해하려고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령의 힘과 능력을 통해, 새롭게 깨달으며 경험하고 있습니까? 십자가의 신비와 비밀은 인간의 그 어떤 지혜와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성령의 빛을 통해 보았을 때,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로 보이게 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통로가 아닌, 오직 성령을 통해 비로소 알려지게 되는, 감추어진 진리란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지혜를 구분합니다. 하나는 세상의 지혜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권력, 명성, 소유와 같은, 철저한 인간 중심적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이 같은 지혜는, 영원한 것이 아닌, 잠시 동안 유지되는 것들로서, 결국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유한한 것들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지혜는, 고난과 고통의 십자가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지혜로써, 세상과 세상의 통치자들은 전혀 알수도 혹은 알지도 못하는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은 이 같은 지혜를 전혀 몰랐기에, 영광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았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지식의 양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능력이 아닌, 오직 성령의 빛을 통해, 자신을 우리들에게 친히 먼저 드러내실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신비로운 분이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10절 말씀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중세 교부로 잘 알려진, 성 어거스틴 역시, 진리는 외부의 교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가르치실 때에만, 비로소 알 수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신앙의 크기를,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종교적 지식으로 여기며,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빛을 통해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순종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우리 가운데 비로소 비추시며 역사하시실 때, 우리는 십자가를 더 이상 실패의 상징이 아닌, 영광과 승리의 상징으로, 비로소 바라보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세상의 눈과 마음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눈과 마음으로 세상을 분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들을 두가지 부류로 나누며, 우리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먼저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육에 속한 사람은, 단순히 세상의 욕구와 쾌락을 쫓아다니다, 결국 타락하게 된 존재들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이성과 감정, 그리고 상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일은 미련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왜 귀한 시간과 물질을, 헛되이 교회에 바쳐 낭비하는가?” 등… 이들에게는 이 모든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대단히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신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을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로 16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적인 눈을 떳다라는 것을, 마치 남들이 보지 못하는 특별한 환상을 보거나, 혹은 미래의 일들을 정확히 맞추는, 신비한 행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사람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해석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성공을,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것은 나의 부를 최대한 축척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닌, 우리 주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 앞에서, 이것은 나의 불행이 아닌, 나를 연단하시는 과정이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영광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들을 외모나, 사회적 지위 혹은 조건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아끼시는 영혼들로 바라보며, 이들을 존종하고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선한 능력으로”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의 가사는, 본훼퍼 목사님이, 죽음을 앞두고 형무소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약혼녀에게, 하나님의 선한 능력을 믿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편지입니다.
사실 본훼퍼 목사님은, 나치 치하에서, 미국으로 피신해, 안전한 교수직을 보장받으며 평생 안락한 삶을 살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눈과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것은 그 자체로 복이었고,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눈으로, 독일 땅 뿐만이 아닌, 나치의 여러 만행으로, 전세계적으로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다시, 미국에서 공포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독일로 돌아가며,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는, 와서 죽으라고 부르신다.” 그는 결국 교수대에서 생을 마감하며 이러한 고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영적인 사람의 눈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세상을 너의 뜻과 생각으로 판단하고 있느냐? 아니면, 성령께서 선물로 주시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 보고 있느냐?”
우리의 눈이, 성령의 빛을 통해 비로소 열리게 되면,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즉, 절망의 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됩니다. 우리의 비천함이, 오히려 겸손의 훈련이 됩니다. 또한, 죽음조차 현실의 마지막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세상이 주는 기준과 가치관에서 벗어나, 오직 성령께서 새롭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비로소 열어 주실 때, 우리는 십자가가 왜 하나님의 능력인지, 왜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하고 가진,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도, 이제는 매순간 십자가를 앞세우고, 그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시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