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 / 토요 새벽 기도회 (요한복음 4:1~14)

오늘도,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 올 한 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오신 분들은, 요한복음 말씀의 내용이, 낯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를 통해, 자주 접하고 들어온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익숙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익숙함 속에는, 위험성 또한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동일하다면, 우리는 당연히 익숙한 길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익숙한 길에서는 두려움이나 긴장감 없이, 편안하고 안정감 있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익숙한 길에서는, 도리어 과속이나 난폭운전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은, 익숙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 평가함으로써, 주변의 위험을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익숙함이, 주변 상황이나 환경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위험한 오판을 일으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오랜 시간 운전을 하는 데 있어, 집에 도착하기 5분의 시간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상황과 주변 경치를 보며,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려, 잘못된 판단으로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도 이와 비슷해야 생각합니다.  평소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쉽게 지나치거나 간과하지 말고, 그럴수록, 좀더 주의를 기울여, 자세히 보며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신 뜻과 그분의 미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물가의 여인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이전인 3장에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조적 인물인, 바로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이 땅의 현실적 문제, 다시 말해, 우리 인간들의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에 대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해결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먼저 예수님은 유대 땅을 떠나 다시 갈릴리로 돌아 가실 때,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이 자칫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사역의 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잃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할 때, 흔히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일반적 경로는,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는 우회도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땅을 가로 지르는 지름길을 놔두고, 구지 먼 길을 우회하여 돌아간 이유는, 이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시대에는, 하나의 통일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 졌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분열왕국 당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사이게 좋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민족 동화 정책으로, 민족간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하지만, 남유다를 점령한 베벨론은, 앗수르의 정책과는 달리, 남유다 백성들을 자신들의 땅인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게 됩니다.  포로로 잡혀간 남유다 백성들은, 그 곳에서 자신들의 선민의식과 정체성을 지키고자,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철저히 거부하였습니다.  이후, 강력한 패르시아 제국이 나타나 바벨론을 점령함으로써, 남유다 백성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후, 고국에 돌아온 남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장 먼저 재건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70년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자, 그 빈자리를 많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차지하게 되었고, 이들이 그곳으로 다시 돌아오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 사람들을 강하게 경계하고 적대시하며,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곳에 정착한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에서 돌아온 남유다 사람들에게, 그 동안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것들을 단숨에 빼앗길까봐 끊임없이 경계하고, 그들을 적대시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자,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큰 적대감이 생기게 되었고, 이들은 서로에 대하여 비난하며, 서로를 멸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남유다 백성들은 북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지 못하고,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무시하며 멀리하였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적대적인 모습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이 두 민족은 사로 원수와 같은 모습으로 지내왔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누가복음 9장의 말씀에서도 자세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후예들인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님의 제자들, 바로 유대인인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 그들을 멸할 생각까지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강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어쨌든,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땅을, 저주 받은 곳으로 여기고, 비록 그곳이 지름길이라 할지라도, 그곳을 지나지 않고, 먼 곳으로 우회하여 지나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길을 택하셨고, 게다가 니고데모와는 완전히 대조되는 한 여인을 일부러 찾아가 만나 주셨습니다.  즉, 니고데모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며 존경받는 교사요 지도자였습니다.  반면,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신 장소인 수가라하는 동네를, 요한은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역사적 의미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즉, 야곱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요셉에게 준 땅에 속해 있는, 바로 야곱의 우물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매개체입니다.  즉, 물로 세례를 베푸시고,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제 우물가에서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을 만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시각은 여섯시, 즉 가장 무더운 한낮이었습니다.  가장 뜨거운 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나온 사연 많은 여인을, 예수님은 일부러 찾아가 만나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주님은 지금도 갈급한자, 절망에 싸인자, 바로 예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을, 직접 찾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복잡해도, 예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참된 해결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우리 삶의 여러 문제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있다면, 세상의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영혼의 치유자 이신 예수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직접 대면하여 만남으로써, 우리 영혼의 영원한 갈급함을 완전히 해소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물을 길으러 나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물을 좀 달라”라고 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물을 청하신 이유는, 아마도 지금 이 순간,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 물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유대인인 예수님을 향해, 대단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의 경계심을 허물 말씀을 던지십니다.  즉,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가 주었으리라.”  이 같은 예수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은,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과연 누가 가져다 줄 것인가?라는 의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우물은 이렇게 깊은데, 그릇도 없이 어떻게 자신에게 물을 줄 수 있느냐고, 자신들은 조상 야곱이 준 우물물을 마시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냐고 받아 칩니다.  그녀의 태도를 보면, 현실의 보여지는 상황에만, 철저히 매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지금까지 그녀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써, 아마도 이전 5명의 남편들과의 약속들을 믿었다가, 허무하게 버림 받은 경험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의심하는 그녀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를 향해, 예수님은 아무리 마셔도 다시 목마를 수밖에 없는 우물물의 한계를 말씀하시고, 당신이 주실 물은 사람의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는 무한한 약속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인생은 지금까지 깊은 우물과 같았을 것이기에, 깊은 우물에서 아무리 많은 물을 계속 길어 올려도, 갈급함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음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새롭게 허락하시는 생명의 물은, 사람의 마음에서 활력 있게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 그 갈급함을 영원하고도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값없이 허락하시는 생수의 은혜는, 목마른 자들을 영원히 만족케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단순히 육신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식수를 가지러 우물가에 왔다가, 예수님의 은혜로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해 줄, 생수를 얻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우리는 생수이신 예수님 앞에서, 단순히 육신의 목마름만을 해결할 식수를 구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안락함, 부유함, 그리고 편안함 등이 아마도 그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이 땅에서의 평안함과 자랑 그리고 성공의 목마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목마름이어야 합니다.  바로, 영생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같이, 이것이 우리 삶의 처음과 마지막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니고데모나, 배신과 상처의 악순환속에 살아온 사마리아 여인이나, 예수님이 아니면 소망이 없는, 한계가 분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밤에 은밀히 자신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를 만나 주셨고, 또한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있던,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을 직접 찾아가 만나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같이, 우리 모두는, 전적인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 거듭나,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값없이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고민들과 문제들을,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해결 받을 수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 즉, 성령의 은혜를 사모해야 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매순간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만나고, 동행하여, 그 분만을 의지하는, 축복의 2025년 한 해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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