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21 / 충만의 삶이란? (시편 23:1~6)

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욕심과 욕망을, 종종 “밑 빠진 독”에 비유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심과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결코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엔소니 드 멜로 신부님이 쓰신 “종교 박람회”라는 책에 보면, 인간의 탐욕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실 이발사가, 유령이 살고 있는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데, 문득 이러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황금 단지 일곱을 갖고 싶지, 그렇지?”  이발사는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자, 욕심이 일어 간절히 외쳤습니다: “예, 그럼요, 갖고 싶고 말고요!”  그러자, “얼른 집으로 달려가 봐. 가 보면 있을 테니까”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단숨에 이발사는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단지 일곱 개가 있었고, 모두 금돈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6개의 단지에는 금돈이 가득했지만, 하나의 단지에는 황금이 반만 차 있었습니다.  이발사는, 반만 찬 단지를 생각하면, 마저 채우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습니다.  그걸 가득 채워 놓기 전에는, 도무지 행복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발사는 자기 집 패물들을 모조리 금돈으로 바꾸어, 반만 차여 있는 단지에 쏟아 넣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차이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발사는, 더욱 저축하고, 절약하고, 자기 자신과 식구들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서, 금돈을 갖다 넣어도, 반만 차 있는 단지는 젼혀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제 이발사는, 금돈을 더 모으고 싶은 욕심에, 임금님께 봉급을 올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다행히 봉급이 두배로 올랐고, 또다시 단지를 채우는 싸움을 이어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단지를 채우고 싶은 강한 욕심에, 길거리에서 동냥질마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금단지는, 금돈을 넣는 족족, 그저 삼켜 버릴 뿐, 전혀 차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발사의 애절한 모습이, 임금님의 눈에도 띄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이발사를 불러 이야기했습니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과거 봉급이 적었을 때에는, 행복하고 흡족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제 봉급이 두 배가 되었지만, 도리어 맥이 빠진 모습이구나.  혹시 일곱 금단지를 가진 게 아니냐?””

 

이발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리고 임금님께 즉시 대답했습니다.  “누구한테 들으셨사옵니까. 폐하?”  그러자 임금님이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요즘 네 행색이 영락없이 금단지 받은 자의 증상, 그대로 구나.  나도 그걸 받은 적이 있었단다.  그때, 난 그 돈을, 내가 쓰거나 혹은 그냥 있는 그대로 저장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는데, 그랬더니 유령은 두말없이 사라져 버리더구나.  사실 그 돈은, 쓸 수 없는 돈으로, 그저 축적하고 싶은 충동만을 부채질하는 것이야.  당장 가서, 유령에게 되돌려주도록 해라.  그러면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신지요?  이 어리석은 이발사와 같이, 현재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버리고, 결코 잡거나 이룰수 없는 황금 무지개를 찾아 다니며, 우리 인생을 헛되이 낭비하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마치 밑빠진 독에, 물 붓고 있는 삶을 지금 살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23편의 말씀은, 이런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를 향해, 밑 빠진 독을 채우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자신의 삶은 ‘부족함이 없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모자람을 느끼는 것이고, 충족되지 못함을 느끼는 우리 마음의 감정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만족은, 충족된 상태, 혹은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마음의 상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은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삶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이러한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라고, 도전과 권면의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첫째로,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우리를 친히 인도하여 주시는, 참 목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합니다.

 

시편 23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에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 님과의 관계를, 자주 목자와 양의 관계의 비유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즉, 목자와 양의 관계는, 절대적인 신뢰와 의존의 관계로서, 이러한 표현은 당시 대다수 유목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즉, 다윗은,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험한 세상의 풍파 속에서 구원하시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셨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친밀함으로 양을 먹이고 돌봅니다.  그리고 양은, 목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신뢰의 관계가 올바르게 형성되지 않으면, 목자의 말을 듣지 않은 양은, 곧바로 사나운 맹수에게 잡혀 먹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누구 보다도 이러한 관계를 잘 알았던 다윗은, 험난한 세월 동안, 자신과 이스라엘의 부족함을,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강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은혜로 충만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좋은 목자를 만나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주님을 직접 대면하고, 대화하며, 우리 삶의 문제와 고민에 대한 충고를 직접 그분으로 부터 들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주님과 대면하며, 지금도 살아 갈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허락하신 말씀을 통해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주님의 모든 말씀 앞에서, 겸손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며, 그 말씀에서 멀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시 때때로 혹은 무의식적으로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보고, 기억하며, 되새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속적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수시로 연결의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묵상하는 생명의 삶이나 오늘의 양식은, 하나님과 우리가 말씀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영적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우

 

리가 이러한 삶을 지속적으로 훈련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분명 말씀을 통해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매순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이 오늘 본문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이끌어 주시고, 그곳에서 평안함을 누리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또한 쉴만한 물가로, 우리를 늘 인도하여 주셔서, 우리의 영혼이 결코 목마르지 않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자, 우리 삶의 영혼의 멘토는, 바로 주님의 말씀으로서, 비록 지금, 우리의 삶이 척박하고, 메마른 광야 같은 장소를 지난다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변함없는 빛이심을 기억하시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살리시는 능력임을, 마지막까지 담대히 믿으며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권능의 팔로, 늘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기록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다윗이 모든 인생의 여정을 지나고, 이제 평화로 안정되었을 때, 과거를 회상하면서 노래한 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시편 23편 전반에 걸쳐, 평화로운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다윗이 왕권을 확고하게 수립하고, 주변 나라들과 전쟁을 모두 마치고 난 후인, 인생 마지막 후반, 어느 평화로운 시기에 기록되었다고 추측합니다.  이때, 다윗은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모든 삶의 여정 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하시어 인도시고 보호하여 주셨음을, 회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그는 참으로 험난한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즉, 사울의 위협으로 인하여,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고, 한때는 가드로 도망하여, 가드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그의 인생에 더욱 안타까운 일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겨우 목숨만 부지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다윗은, 평화를 누리고 있지만, 지나온 그의 시간은, 고난과 투쟁의 치열한 시절이었음을 회상하게 됩니다.  다윗은 자신의 이러한 인생 여정을, 오늘 본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과 환난으로 인하여,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캄캄한 터널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주님께서 늘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과거 목동 시절, 양들을 지키던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인생에 참 목자가 되어 주셨던, 하나님을 마음 깊이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환난과 마주하게 됩니다.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고난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은, 늘 연역한 우리에게, 바닥을 알지 못하는 늪과 같은 깊은 수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혼자의 힘으로, 그곳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절대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 우리 주변 사람들의 도움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도움은, 바로,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서, 친히 행하시는 주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헬라어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단어인 “소테리아”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 날수 없는 장소에서, 외부의 절대적 힘 혹은 도움을 통해, 비로소 그곳을 벗어 나는 것을 말합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양 피로 인하여, 죽음의 영이 이스라엘의 가정을 넘어 가듯, 예수님의 희생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이, 새로운 삶을 다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 혹은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탈출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우리 인생 가운데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를 늘 구원해 주시는, 주님의 도움의 손길을 믿고, 간절히 의지하며 나아간다면, 우리 삶은 분명히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온전히 회복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순간 성령의 능력을 믿으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시인 다윗은 시종일관 자신의 인생은,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삶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세상적 관점에서 다윗의 인생이 풍족해서가 아닌,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주님께서 친히 목자가 되어 주셨기 때문이고, 또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늘 그의 앞길을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주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자신의 머리 위에 부으셨기에, 더욱 충만한 삶을 살았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원수의 목전”이라는 표현은, 아직 원수들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한 상황이지만, 목자가 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반드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미래적 확신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시인 다윗은, 비록 자신의 삶이, 여전히 주변의 원수들 가운데 둘러싸여 있지만, 주님의 은혜로,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확신하며, 미리 축제의 상을 베풀어 주시는 주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번영을 이룬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게 세운 다윗을, 원수의 손에서 벗어 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을 완전히 제압하고,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아, 엄청난 축복과 명성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주님의 은혜였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이 모든 고백의 마지막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삶이 되도록, 성령의 힘과 능력을 통해, 인도하고 계십니다.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들의 착각이었습니다.  마치, 깨어진 독에 처음 물을 부으면, 차는것 처럼 보여도, 시간이 지나면, 그 안에 물이 모두 없어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이 잡히시자, 그들의 힘과 능력이 모두 사라져, 그만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들 앞에 나타나자, 이들은 새롭게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자들이 아닌, 성령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시절,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달마야 놀자”입니다.  이 영화에서, 자신을 절에 받아 주면, 무엇이든 다 하겠다는 주인공에게, 한 스님이 먼저, 여기 깨진 독에 물을 받으면, 받아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공은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주인공은, 깨진 항아리를 들어, 연못에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깨진 항아리에 비로소 물이 사라지지 않고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깨진 독에 물을 채우라 하면, 깨진 항아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깨진 항아리를 보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진정, 물을 채우기 위해서는, 깨진 항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물이 빠져나가도 계속 채워지는, 상황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깨진 항아리가, 물이 충만한 연못 속에 들어가 있을 때, 비로소 물이 사라지지 않고 가득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깨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계속 채워 넣습니다.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계속 부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치고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갈급함을 본질적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연못에 빠진 깨진 항아리와 같이, 우리도 계속 채워질 수 있는 상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우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성령께서 계신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크신 힘과 능력, 그리고 지혜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 했을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질 것이고, 우리는 부족함과 갈급함이 없는 삶을 매순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

더 이상 깨어진 항아리와 같은, 우리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삶이 아닌, 이제는 그 깨어진 항아리를 품고, 온전히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인 다윗은, 이러한 삶이야 말로, 부족함이 전혀 없는 충만한 삶이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더 이상 우리가 좋아하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우리의 깨어진 마음에 담으려 하기 보다, 이제는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 안으로 들어가, 그 모든 말씀이,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그리고 충만하게 스며들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풍성한 은혜속에서, 말씀이 이해되기 보다는 말씀이 믿어지고, 반복적인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새로운 삶으로 변화되는, 성령 충만의 역사가, 오늘 우리 가운데 놀랍게 일어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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