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 / 너는 내것이라! (이사야 43:1~7)

할렐루야!  오늘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에 참여하시는,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지난주 부터 주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대림절은 다시 오실 주님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시간이었다면, 주현절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음을 기억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기에 주현절은, 빛이 어둠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듯,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악과 허물로 가득한 이 세상에, 하나님 영광의 빛이 밝히 드러나는 시기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두워져 가는 세상을 환히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가리게 되는, 여러 뉴스들과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제는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고, 도리어 세상이 교회가 새롭게 변화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전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2025년 주현절을 맞이하는 이 시간, 과연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주님은 어떠한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새로운 주님의 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한병철 교수님이 쓰신, “피로사회”라는 책에 보면, 현대의 질병은, 지나친 긍정성으로 인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는, 과잉 격려와 그로 인한 무리한 활동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와 우리 사회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함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기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이 무능한 존재로 인식 될까봐, 불안하고 우울한 시간을 보낸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피로사회에 갇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한때, 우리는 긍정적 사고 방식을, 참된 믿음으로 간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즉,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다”, “잘 될 수밖에 없다”라는 긍정의 사고와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저는 비관주의자도 아니고, 이러한 긍정적 사고가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위로와 희망이 절실히 필요한 존재들입니다.  또한 부정적 사고 보다는 긍정적 사고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새롭게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 우리의 한계를 무시한 거짓된 위로와 희망은, 도리어 어떻게 해도 절망적인 결과 만이 기다리는 상황 속에서, 희망고문과 같이 우리를 더욱 좌절케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이같은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무조건적인 적극적 사고 방식이나, 혹은 긍정 과잉의 희망이 아닌, 우리의 무력함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참된 진리로부터 임하는 명확한 약속에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산소망만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장차 희망의 뿌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의 말씀은, 남유다가 멸망하여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로 있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바벨론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기에,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한마디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이사야 40장부터는, 이스라엘의 철저한 회개와 심판을 뒤로 하고, 이제는 위로와 희망을 말씀, 바로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음성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현실은 여전히 두렵고 불안하기만 했습니다.  주변 현실을 보면, 막강한 바벨론의 힘은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고,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 짖어도, 하나님은 마치 침묵하시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이어서, 2절과 5절에서 하나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말씀이, 이들에게 희망보다는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과 함께하신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을 가까이에서 목도하셨고, 그 결과 맹렬한 진노를 쏟아부으셔서, 이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처해 있는 현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에는, 그 말씀이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지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런 일이 과연 우리에게 지속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같은 비참한 현실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

 

그러한 이들에게, 하나님은 과거 자신이 그들의 조상과 함께 하신 모습을 통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한글 번역본에는 없지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그러나 이제”라는 말로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즉, “그러나 이제,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분명, 남유다는 하나님의 징계 중에 있었고, 지금 이들이 처한 현실은, 미래를 전혀 기대하거나 소망할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주변 현실을 바라보면, 도저히 달라질 것 같지 않고, 심지어 아무것도 달라 질수도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고 그동안 실체가 없는 희망 사항에 실망했을 지라도, 이들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시고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들을 친히 구원하시겠다리고 선포하신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에, 이들을 이 같은 고난과 고통에서 인도해낼, 유일한 구원자가 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그러나 이제”라고 강조하여 말씀하면서,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이가 새롭게 말씀하신다”라고 힘주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다가옴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무리 경제가 좋다 혹은 나쁘다 힘주어 이야기하더라도, 사실 미국 경제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인 제롬 파월이, 미국 경제가 좋을 것이다 혹은 나쁠 것이다, 공식적으로가 아니라 사석에서 이 같은 이야기를 해도, 바로 미국 경제가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아, 주식이나 금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이”, “내가 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 “내가 지었고 만들었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월터 브루그만이란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결코 사람이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하시고, 하나님만이 새로운 가능성, 바로 우리의 기대와 추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가능케 하십니다.  그렇기에, 아직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의 신비와 거룩성에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바로 우리의 희망이나 절망으로 인해 절대 닫히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인 복음은, 이제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 이제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속하여, 그것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고, 또한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끌어올리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에서, 창조주이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은, 남유다 백성들 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를 향해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네 삶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들을 “내 아들’이고 내 딸’이다”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모든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어찌 모른척하고 버리시겠습니까?  물론, 지금 남유다 백성들이 처한 현실은, 2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강을 건너는 것과 같고, 불 가운데로 지나는 것 같이, 매 순간이 두렵고 떨리며 힘에 붙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실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위로의 말씀하십니다.  “강이 너희를 침몰시키지 못하게 하며, 불꽃이 너희를 조금도 사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

 

이러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과거 애굽과 구스와 스바를 속량물로 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며, 세상 그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를 반드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비록, 우리가 생각하고 원하는 형식과 방법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최선을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롭게 거듭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새로운 관계로의 부르심이고, 새로운 사명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창조자요 구원자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최고의 목적이요, 사명인 것입니다.

 

예언자의 기도라는 책에 보면, 이러한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는 공포와 불안에 휩싸인 백성들입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쌓아 올린 세계가 무너질까 두려워하면서 매일을 살아갑니다.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 도덕적인 타락을 두려워하고, 피할 수 없는 위험과 수고를 두려워합니다.  잘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잘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소외될까 두려워하고, 버림받을까 두려워합니다.  우리 자신의 그림자에 갇힐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두려움 한가운데서 당신의 음성을 겸손히 믿음으로 듣습니다.  “두려워 말라.  너는 내 것이요,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2025년 교회 표어를, “상황 말고, 주님을 바라보자, 주님이 다스리신다”라고 정하였습니다.  물론, 우리가 마음을 굳게 먹는다고 하여, 이 같은 모습이, 하루 아침에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후계자요, 사랑하는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라고 권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부터 오는, 거짓된 평화요, 위장된 평안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세상의 것들에 거짓과 속임수에 현혹되어, 세상에 휩쓸리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되,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르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세상을 이기는 삶을, 주님을 의지하며 매순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사랑하시어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 하지말라.  왜냐하면, 너는 내 것이기 때문이다.”  2025년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참된 진리의 말씀 안에서,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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