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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2.28 / 토요 새벽 기도회 (마태복음 18:21~35)

오늘도,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여전히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용서입니다.  즉,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드릴 수 있습니다.  헌금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를 아프게 한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 즉시, 우리 마음이 닫혀버리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사람은 그때 정말 너무했어.”  “나에게 사과 한마디도 안 했어.”  “나 역시, 아직 만나서 그를 용서할 준비가 안 됐어” 등 여러 이유와 핑계가 생겨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룹니다.   즉,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당시, 유대교 랍비들은,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들을,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일곱 번”이라고 말하며, 아마도, 랍비들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자신이, 더 자비롭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인정과 칭찬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즉,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번을 곱한, 490번을 세며, 용서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더 이상 용서를 계산하지 말라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 속에, 한 왕이 등장합니다.  그 왕은, 왕이 종들과 결산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종이, 왕에게 만 달란트를 빚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만 달란트의 금액은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그 당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명이, 약 20년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임금입니다.  그렇기에, 만 달란트는 20만 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죄가, 얼마나 크고 상당한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만 달란트를 빚진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모습을 솔직히 돌아보면, 이 같은 엄청난 크기에 비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생각보다 가볍게 여깁니다.  즉, “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나는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며,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기준에서, 우리의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스른 반역과도 같기에, 우리에게는 비참한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 이 같은 빚을 절대 갚을 수 없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이 전혀 지킬 수 없는 말을 왕 앞에서, 하게 됩니다.  “참아 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지만 이 같은 약속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빚을 전부 탕감해 주게 됩니다.

 

여기서 “불쌍히 여겼다”리는 말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긍휼함과 자비심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겨, 당신의 독생자 이들인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십자가 사건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내가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자임을 자각하고 있으십니까?  그로 인하여 십자가의 은혜가 여전히 나의 삶을 감격하게 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받은 용서를 잊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자들임을, 다시금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은혜를 잊는 순간, 악한 종이 된다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장면이 바뀝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종은, 기쁨과 감사함으로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마주하게 됩니다.  여기서 백 데나리온은, 100일치 품삯입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지만, 자신이 왕으로부터 탕감 받은 만 달란트와는, 결코 비교가 되지 않는 크기입니다.

 

그런데, 이 종은 동료의 목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당장 빚을 갚으라!”  그러자,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며 부탁합니다.  “잠시 참아 주소서.  어떻게든 속히 갚으리이다.”

 

이 말, 어디서 많이 들어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탕감 받은 종이, 바로 직전 왕에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자신에게 빚진 자를,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 즉시, 자신의 동료를 감옥에 가둡니다.  이 같은 모습은 다름 아닌, 은혜를 잊고 망각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만을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내 허물을 덮으시고, 다시는 묻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상대의 허물을 반복해서 떠올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떠벌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를 잊은 자들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 왕은, 그 소식을 듣고, 그를 다시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빚을 다 탕감해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들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단어는, “마땅하지 아니하냐”입니다.  즉, 용서는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닌, 은혜 받은 자들의 마땅한 자세요, 삶의 모습이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기는 완악한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 시간, 용서는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우리는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붙들고, 매순간 씨름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형식적인 모습이 아닌,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마치시며,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여기서의 핵심은, “마음으로부터”입니다.  즉, 우리가 예의상, 입술로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마음으로는, 계속 미워한다라면, 그것은 진짜 용서가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이, 우리가 “용서를 못 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라는 협박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진짜 용서받은 사람들에게는, 그에 합당한, 용서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나타나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용서는 우리 감정으로부터 시작되는 느낌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 우리의 의도적 결단이란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는 이제 저 사람을 정죄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더 이상, 앙심과 보복의 마음을 품지 않겠습니다”란 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 했을 때, 성령께서, 이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만지시고,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을 실천하며 이겨낼 수 있는, 새 힘과 능력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용서는 단 한 번에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나아갈 때, 이 모든 과정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아름답게 이루어져, 반드시 선을 이룰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모두는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 모두는 용서의 걸음을 내디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상대를 풀어주는 동시에, 그 동안, 우리 자신을 묶고 있던 억압과 고통의 사슬을 끊는 길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상대를 묶는 것이 아닌, 나를 묶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사랑의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는 용서받은 자 답게 살고 있느냐?”  우리가 용서받은 자 답게 살고 싶다면, 우리가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제 그 십자가 앞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위해, 말씀을 붙들며,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 옵소서.”  그러했을 때,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 모두를, 용서하는 자로 빚어 가실 것임을 믿으시며, 우리 모두 이러한 결단의 삶을, 오늘부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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