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초대 교회 위대한 신학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한 제자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덕이 무엇입니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겸손입니다.” 그러자,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덕은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겸손입니다.” 제자는 세 번째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중요한 덕은 무엇입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으면 어떠한 덕도, 진짜 덕이 될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세번씩이나 “겸손”이라는, 같은 대답은 했겠습니까? 왜냐하면, 겸손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야고보서 4: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본문 말씀은,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입성이 아닙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를 향한 구원의 최종 행진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는지, 그리고 사람들은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어떻게 오해했는지,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앞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벳바게라는 마을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라.” 그리고 누가 묻거든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묵상한 마태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이 스스로를, ‘주’라고 부르신 경우가 거의 없었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왕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장하시는 방식입니다. 즉, 예수님은 그 당시 왕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을, 타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말은, 전쟁을 상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전쟁을 상징하는 말이 아닌, 늘 사람들 주위에서 묵묵히 무거운 짐을 나르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것은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말과 대비되어, 낮아짐과 평화를 추구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이유는, 오래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하길,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나니”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전쟁의 왕이 아닌, 평화의 왕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즉, 세상을 힘으로 정복하려는 왕이 아닌,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구원하시려는 겸손과 섬김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힘과 능력 그리고 권세로 왕이 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바로, 진정한 왕의 권위는, 누군가의 위에 서서, 누군가를 지배하고 짓밟는 힘이 아닌, 나를 낮추어 평화를 이루는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의 말에서 과감히 내려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매순간 순종하며, 겸손과 섬김의 나귀를 탈 수 있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이 같은 평화의 왕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오늘 본문, 8~9절을 보면, 사람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즉, 예수님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길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문화에서, 자신의 겉옷을 길에 까는 것은, 왕에게 절대적 복종을 의미합니다. 또한, 종려나무 가지는, 전쟁에서의 큰 승리를 상징입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를 구원할 왕이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어떤 구원을 기대하며 바라보았느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장차 로마의 폭정과 압제를 무너뜨릴 정치적 왕으로 기대했습니다. 바로, 이들은 예수님은, 가난에서 구해줄 왕, 로마에서 해방시킬 왕, 우리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위대하게 일으킬 왕 등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들의 이 같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 땅에 친히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신 예수님을 향해, 이들은 불과 며칠 후, 이렇게 외치게 됩니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혹시 우리도, 어느 순간 예수님을 내가 원하는 왕으로, 내 스스로 만들고 놓고, 나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크게 원망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즉, 예수님을, 내 문제의 해결사, 내 사업의 성공 도우미, 혹은 내 삶을 편하게 지켜주는 왕으로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뜻과 방식으로, 온전히 역사하시는 왕이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기억하시며,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겸손의 왕을,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섬김을 상징하는 중요한 존재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것은 나귀입니다. 그 당시 나귀는, 왕을 상징하지도, 혹은 주인공을 상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나귀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입성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입성에 있어, 나귀는 무엇을 했습니까? 그저, 묵묵히 예수님을 태우고 갔을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나귀와 같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왕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왕을 모시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모신 나귀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혹시, “사람들이 나에게 옷을 깔았다.” 혹은 “사람들이 나를 향해 호산나 라고 외쳤다.”라며, 나귀가 의시 댈 수 있겠습니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나귀 때문이 아니라, 그 위에 타신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 우리가 칭찬을 받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크게 인정받게 되었을 때, 그 영광은 사실, 우리 때문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마지막까지 유지해야 하는 신앙의 핵심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인 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섬김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친히 따라가고자 결단하는 우리 모두는, 높아지려 하기보다, 낮아져야 합니다. 대접받기보다, 섬겨야 합니다. 자랑하기보다, 늘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재능, 성공은 모두 주님을 모시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이제는, “내가 했다”라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오직 “주님이 하셨다”라는 고백으로 나아갈 때, 우리 모두는 비로소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주인공이 되려 하지 말고, 왕을 모시는 충성스러운 통로가 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하늘의 은혜를,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누리며 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