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종종 경험합니다. 즉, 전도해야 하는데 망설여 질 때, 누군가를 도와야 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지나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하는데 다음으로 미루고 있을 때 등, “나중에 하지 뭐…,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 괜히 했다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바로, 이러한 생각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한 자리로 반복하여 물러섭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 신앙에서 가장 위헌함 상태는, 실패가 아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임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저마다의 달란트를, 과연 어떻게 소유하며, 사용해야 하는지, 달란트 비유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쩌면, 제가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여러분들 마음에는, 이미 제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결론을 내릴지, 미리 짐작하고 계신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종종, 너무나 익숙한 성경 본문을 읽거나 접할 때, 나는 이 말씀을 “어려서 부터” 혹은 “몇 번이나 들어” 너무나 잘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며,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정해진 결론들 만들 떠올리며, 그 말씀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오해하곤 합니다. 저는 달란트의 비유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본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은 달란트의 비유를, 이렇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열심히 일해서 성과를 내라.” “하나님은 마지막에, 우리 삶의 결과를 보시고 평가하시는 분이다.”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칭찬, 못 남긴 사람은 장차 심판이 기다린다”라고, 마치 수학공식과 같이, 이해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솔직히, 우리 대부분은 이 비유를, 지금까지 “실적”과 “결과”에만 집중하여, 이해해 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우리 현재의 상황과 시점이 아닌, 예수님이 활동하신, 그 당시 시대의 관점과 사고로 돌아가, 오늘 본문을 다시금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래 했을 때, 우리는 이 달란트의 비유가, 무엇인가를 남겨야 하는, 경영과 실적의 내용이 아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크고 위대한 은혜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떠한 분이시며, 누구이신지, 다시금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명의 종들이 등장합니다. 즉, 주인은 잠시 여행을 떠나며,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종에게는, 두 달란트를,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마지막, 한 달란트 받은 종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아무것도 안 한, 불의한 청지기다. 그런데 그 당시 문화에서, 이 사람을 바라보면, 우리의 지금 이해와는 전혀 다릅니다.
즉, 그는 돈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사회의 생활 전통과 규범 그리고 지혜를 담고 있는 “미슈나”에 따르면, 돈을 땅에 묻는 행위는, 마치 은행 금고에 돈을 넣어 두는 것과 같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전쟁이 아주 빈번한 사회였습니다. 그렇기에, 적들이 갑작스럽게 침공하게 되면, 약탈과 화재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보존 방법은, 다름 아닌 자신만 알고 있는 땅에, 재산을 숨기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그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무책임하고, 불의하며, 게으른 사람이 아닌, 주인이 맡긴 돈을, 그 누구보다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키고 관리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인은, 자신의 돈을 그 누구보다 잘 지킨 그를, 왜 “악하고 게으르다”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서의 핵심은, 그의 행동이 아닌, 바로 그의 마음 중심에 놓여있는, 하나님 이해에 있었습니다. 즉, 그는 자신을 질책하는 주인 앞에서,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나는 당신을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이 문장에서, 그의 주인에 대한 모든 이해가 명확히 드러납니다. 즉, 그는 주인을 이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무서운 사람이야. 실패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야. 작은 실수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벌하는 사람이야.” 그래서 그는 이러한 선택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에게 가장 안전하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로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혹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괜히 나섰다가 실패하면 안 된다.” “괜히 시도했다가, 문제 생기면 어떡하지.” “지금 상태를 유지하는게 제일 안전하다.” 바로, 아무것도 하지 많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으니, 그렇기에 나는 적어도 주인으로부터, 질책을 받지 않을 것이기에, “괜찮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는 열심히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고, 믿음을 말하지만, 아무런 도전도 하지 않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혹시라도, 지금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 같은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참 믿음이 아닌,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하나님을 오해하여 만들어낸, 우상이요, 두려움의 신앙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회에서 이러한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내가 벌써 은퇴할 나인데, 교회에서는 아직도 현역이다. 우리 교회는 봉사할, 젊은 사람이 없어서 큰일이다. 과거에는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세상의 관점이 아닌, 성경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서는 나아가 들어 내가 필요 없다고 은퇴시켰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 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주시는 구나….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봉사할 기회가 나보다 더 많이 있으니,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후회의 시간이 오기 전에, 좀더 열심히 봉사하자. 지금은 건강도 좋지 않고, 몸도 많이 허약해졌으니, 주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그나마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들으며, 그 말씀대로 더 열심히 행하자.
솔직히 말해, 우리가 나이가 점점 더 들어, 몸이 약해지고 쇠해져 간다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시간이, 다른 이들보다, 더 가까이 오고 있다라는, 명확한 증거요, 경고의 시간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주변 다른 이들보다, 이 땅에 좀더 오래 살고 있다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행하고 실천할 기회를 더 많이 허락하시어, 우리 모두를 장차 구원의 완성으로 이끄시고자 하시는, 마지막 기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한편으로 대단히 실례가 되고, 여러분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알고, 기억하며, 대비해야 할 사실은,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에, 우리의 뜻과 생각을 가지고, “이정도면 됐지”라고 생각하며 준비하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아닌, 오직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이, 진정 원하시고 말씀하신, 그 모습 그대로 준비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제대로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들을 향해, 매우 중요한 단어 하나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16절에 등장하는 “바로 가서”란 단어입니다. 새번역 성경은 “곧 가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어떠한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적 환경과 조건도 전혀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인의 의도를 알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행했을 뿐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은 주인을 온전히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신뢰는 행동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굳게 믿고 의지하게 되었을 때, 단순한 말에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동이나 실천으로 나아간다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진정한 신뢰는, 말보단 일관된 행동으로 증명되며, 이 신뢰가 쌓이게 되면, 그 구성원들은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된다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 같은 모습이, 바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이들은 주인으로부터, 그 어떤 결과도 보장받지 않았습니다. 실패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여러 위협과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즉시” 움직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인을 확고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나의 주인은, 나를 벌하려 하시는 분이 아닌, 나를 믿어 주시는 분이다”란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을 비교하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다른 종들 보다, 너무 적게 받았다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숫자적으로 적게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한 달란트 받은 종도, 사실은 엄청난 것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 달란트의 가치는, 대략 6,000데나리온으로, 한 명의 노동자가 아무것도 쓰지 않고 모아야, 간신히 모을 수 있는, 약 20년 연봉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 달란트라 해도, 그것은 겨우 동전 한 개가 아닙니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충분한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것을 주인의 “은혜”가 아닌, 그것을 “부담”으로 받았습니다. 반면, 다른 두 종들은, 그것을 “은혜” 바로, 또 다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고 체험 할 기회”로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같은 은혜의 기회를 부여 받았지만, 그 결과는 하늘과 땅의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 명은, 주인의 부재 중에, 장차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반드시 남겨야 한다”라는, 결과에 중요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두 명은, “무엇을 남길 것인가?”의 결과보다, “어떠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다시 오실 주인을 기다릴 것인가?”에, 더 중요한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다시 오실 주인인,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가장 원하시고, 바리시며, 기대하시는 모습은, 다름아닌,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달란트를, 우리의 삶과 세상 속에서, 얼마나 신실하고 성실하게,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치 무서운 채권자로 오해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런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저 안전하게 유지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요, 우리 교회의 모습인인가? 아니면, 위태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 그리고 그 복음의 가치를, 세상의 왜곡된 기준과 끊임없이 충돌시키며, 복음을 거룩하게 소비하는, 우리의 삶이요, 우리의 교회인가?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기회를 활짝 열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같은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구원의 결말로, 아름답게 끝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즉, 목마른 말을 물가로 억지로 끌고 갈수는 있어도, 그 물을 마시는 것은, 말 스스로가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온전히 완성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철저한 순종과 믿음의 결단을 통한, 행함임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사람에게, 복음의 달란트를, 저마다의 모양과 재능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잘 간수하고 보존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 마지막까지 세상에 나아가, 쓰고,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물 같이, 하나님의 정의가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고,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를 포함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달란트의 비유를 접할 때 마다, 크게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나는 내 힘과 능력으로 열심히 일해서, 무언가의 큰 업적을 남겨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천국에 들어 간다”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대단히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해석은, 자칫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이 선물로 허락하신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다시 우리의 공로와 행위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비유의 마지막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의 칭찬을 유심히 보시기 바랍니다. 주인은 이렇게 칭찬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이 남겼다”가 절대 아닙니다. 주인의 칭찬은, “착하다”와 “충성되다”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말씀이, 이어지는 다음 부분에 등장합니다. 그것은, 앞으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입니다.
다시 말해, 이 비유의 결론은, 무언가를 크게 이루고 남긴 성과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주인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있는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왜 비극적으로 마감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목격하게 됩니다. 즉, 그는 주인의 돈을 전혀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을 잃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과의 관계입니다. 그는 주인을 오해했고, 그 결과, 주인과 관계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끊어지고 단절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명, 한 명을, 업적의 무게와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는 분이 아닌, 그저 우리를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초대하고 계시는 분이 십니다. 즉, 무언가의 “성과를 내라”가 아닌, “나를 믿고 담대히 행동하며 살라”라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착하고 충성된 결과는, 앞으로 하나님이 친히 책임져 주시겠다라는, 약속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들은, 과연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실패하면 벌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들을, 그저 안전하게 지키길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최고로 칭찬하시는 하나님입니까?
하지만, 오늘 달란트의 비유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까지 품으시는 분이시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도전을, 기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 삶을 통해, 복음을 끊임없이 세상 속으로 흘려보내길 원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며, 최선을 다해 매순간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말씀 앞에서, 둘 중하나를 반드시 결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음의 달란트를, 두려움으로 그리고 게으름으로 인해 땅에 묻어둘 것인가? 아니면, 풍성한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세상으로 나아가,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 부터, 담대히 복음을 전하며, 흘려 보낼 것인가? 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만의 안전한 울타리에서 나와, 이제는 “세상”이라는 위태로운 장소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의 모든 세상적 핑계를 뒤로하고, 우리가 가진, 복음의 모든 달란트를, 기쁨으로 소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납하며, 서로 섬김으로, 우리가 가진 복음의 달란트가, 잠자는 땅에서 벗어나, 이제는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 우리의 참 주인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받기를 소원합니다. 그 결과, 장차 그분이 예비하신 영원한 즐거움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참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구원과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