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교회의 규모가 작던 크던 상관없이,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 성경을 많이 읽고 아는 사람, 찬양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이 같은, 드러난 모습을 통해, “저 사람은 믿음이 좋다.” “저 사람은 대단한 신앙인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성경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계심을 발견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우리의 외적 모습이 아닌, 우리 안에 “과연 사랑이 있는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 매우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인 방언을 해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소음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언을 해도, 그 안에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 주어도, 그 안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의 성과나 능력보다, 사랑이 제일 으뜸이요,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만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고, 이 세상을 온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김기석 목사님은, 성경의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사랑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내 평온을 깨뜨리고, 구체적인 한 사람을 환대하는 의지적 실천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두벌의 옷을 가졌기에, 그 중에 하나를 나누는 것이 사랑이 아닌, 오직 내가 가진 단 한 벌 밖에 없는 옷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을 위해, 기꺼이 나누는 것이, 바로 성경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어떤 하나님의 은사보다 소중한 사랑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세 가지 은사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말의 은사입니다. 즉,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영적 능력의 은사입니다. 바로, 예언과, 지식과,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희생의 은사입니다. 즉, 전 재산을 나누어 주고,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희생하며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큰 규모의 사역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먼저 우리의 동기를 명확하 보시는 분이심을, 성경은 시종일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나는 왜 봉사하는가?, 나는 왜 헌신하는가?, 나는 왜 섬기는가?, 나는 오늘 왜 이 예배에 참석했는가?, 이 모든 것들이 정말 하나님과 우리 주변의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 자신의 기쁨이나,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인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자신이 가진 은사들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심지어, 누구의 은사가 더 큰지, 혹은 누가 더 영적인지를, 자신들의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경쟁했습니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사랑이 빠진 모든 은사들은 결국 소음에 불과하다.”
어쩌면,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 같은 위험에 놓여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봉사를 많이 하면서도, 그 안에 사랑이 없을 수 있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서도, 얼마든지 사랑이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매주 교회 출석을 하더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의 외적 결과물과 여러 성과를 바라보며, 마치 자신의 믿음이 크다고,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신다고 착각하며,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계산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세상은 결과를 중요시하며 계산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의 동기를 제일 먼저 바라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어떤 위대하고 거창한 성과를 거두더라도, 사랑 없는 100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0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심 어린 사랑이 담긴 1은, 비록 세상적 관점에서, 작고, 보잘 것 없이 보일지라도, 하나님 나라에서, 크고, 위대하며, 영원한 가치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이 했는가, 얼마나 많이 남겼는가 보다, 그것을 왜 했는가를 가장 중요하게 보십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위대한 은사와 헌신이라 할지라도, 사랑 없는 은사는 소음이 되고, 사랑 없는 헌신은 공허한 종교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깨어 기도함으로써, “무엇을 했는가?”의 결과에 초점을 맞추는 어리석은 신앙이 아닌, “사랑으로 했는가?”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는, 참신앙을 소유해야 함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은 자신을 내려놓는 결단임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을 설명하면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를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추상적 생각이나 이론이 아닌, 실천이며, 구체적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랑의 구체적 실천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중심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내려놓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김기석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나의 쾌적한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일”로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며, 마음껏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합니다. 내 시간도 일부러 소비해야 합니다. 내 마음도 기꺼이 써야 합니다. 내 자존심도 과감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라고 우리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까운 사람들을 사랑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바로 우리 가족을 사랑하기가 어렵고, 배우자를 사랑하기가 어려우며, 지금 우리와 같이 신앙 생활을 하는 있는, 교회 성도님들을 사랑하기가 제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사랑은 추상적인 상황이나 개념이 아닌, 구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실제로 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같은 일들을, 우리들 앞에서 실제로 행하시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는 사랑인지를, 우리 모두에게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사랑은, 느낌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바로, 사랑은 상대가 사랑스러워서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존재이기에, 우리가 기꺼이 품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나를 높이는 길이 아닌, 오히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로소 이 같은 길을, 믿음으로 매순간 걸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모습을 온전히 닮아 가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사랑은 진리 안에서 끝까지 견디는 힘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랑과 진리를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으로 대표되는 포용성과, 진리로 상징되는 엄격함이, 서로 상충되는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둘을 결코 분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임을 강조하며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참 사랑은 죄를 묵인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거짓을 방관하지 않습니다. 참 사랑은 상대방이 진리 안에 서도록 기꺼이 돕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오늘 본문 7절에서, 다시 한번 힘주어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참 사랑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우리 인간들이 우리와 가까운 가족만을 사랑하는 원초적 본능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따라, 다른 존재들을 포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은사요, 거대한 기적과 같은,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사랑, 바로 그 자체가, 기적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상처받고도 용서할 수 있는 것. 배신당하고도, 다시 품어 주는 것. 실망하고도, 또 다시 기다려 주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이 모든 일들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사랑의 모든 근원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히브리어, “헤세드”라고 표현합니다. 이, 헤세드의 뜻은, “아무 조건 없이도 용서하는 사랑. 배신당해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셨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도,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매번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실패했을 때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새롭게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 같은 사랑을 온전히 받은 사람만이, 이제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혹시라도, 우리가 여전히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먼저 하나님의 “헤세드”와 같은 사랑과 은혜의 강물 안에, 깊이 들러가 머무시기 바랍니다.
그러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사랑이 아닌, 모든 감정이 식어도,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끝까지 참고, 기다리며, 품어 주는 사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값없이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으로,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기꺼이 품음으로써, 세상이 우리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역사하심을 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본문 “사랑”이라는 단어에, 여러분들의 이름을 한번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정균이는 오래 참고”, 정균이는 온유하며”, 정균이는 시기하지 아니하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한번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고”, “예수님은 온유하시며”, “예수님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끝까지 견디셨다.” 이것은 완벽하게 이루어진 말씀이 됩니다.
이 같은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는 명확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목표는 은사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성공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매순간, 나의 뜻과 생각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닌, 주님이 가신길을, 그대로 쫓아가, 그분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내 평온을 깨뜨리더라도, 나를 힘들고 아프게 한, 그 한 사람을 품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먼저 손을 내밀어 보십시기 바랍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내 주변 누군가를 살리는 선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했을 때, 우리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통해, 가장 위대한 기적, 바로 사랑의 기적을 우리 가운데, 드러내 이루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의 남은 모든 삶이, 온전히, 그리고 매순간 주님의 사랑을 따라 닮아 가는 복된 모습이 되시기를,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