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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7 / 새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 31:31~34)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은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로, 다음주는 종려주일이자 고난 주간이고, 그 다음주는 이제 부활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는 사순절 기간, 특별히 성경 필사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묵상하며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하고 계신 분들로 계시지만, 혹시라도 중간에 포기하신 분이 있다라면, 이전에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자책하지 마시고, 남은 기간동안 최선을 다해, 성경 필사에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예레미야 31장 31~34절의 말씀을 통해, “새 언약을 맺으리라!”라는 제목으로,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과 설교의 제목에 등장하는, 언약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약속을 의미합니다.  약속은 서로간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합의하여 정해 두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병원에 방문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상담원과의 대화를 통해, 언제 의사를 만날 수 있는지 문의를 하고, 그후, 제가 방문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정하고, 그곳에 가는 것이, 바로 약속인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약속이라는 단어는, 비즈니스에서 사용하면, 계약이 됩니다.  즉, 제가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여, 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당사자 간에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떻게 보상을 받을 것인지에 대한, 공개적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약속을 한 쪽에서 깨뜨린다면, 약속을 어긴 당사자는, 그에 대한 적합한 보상을 하든가 혹은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약속과 계약은, 서로 간의 신뢰를 유지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사회적 덕목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예례미야서의 말씀 속에서도, 약속, 다시 말해, 언약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단어, “브리이트”의 뜻은, 먹는다 혹은 자른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그 당시, 서로가 계약을 맺게 되면, 짐승을 잡아, 함께 축하하며 음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러한 모습 때문에, 언약이라는 단어에는 “먹는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만약 이러한 서로간의 계약을,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어기게 된다라면, 잔치를 위해 짐승을 잡았던 것과 같이, 약속을 어긴 상대방이, 이와 같이 비참하게 잘려질 것임을, 암묵적으로 경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많은 계약의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모세와 하나님이 맺은, 시내산 계약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모든 율례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그 모든 말씀을 성실히 준행할 것을 서약하며 받아들였으며, 이에 모세는 화목제물의 피를 백성들에게 뿌리고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라””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함으로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러한 과거의 언약이 파괴되고, 이제 새로운 언약이 다시 맺어 졌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전의 언약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었기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선지자 예레미야는, 활동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 눈물로 선포한 사람입니다.  그 이유는, 과거 하나님과 맺은 시내간 계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방적 거부로, 더 이상 지켜지지 않아 파기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면서 타락의 길로 들어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라는 약속을 버리고, 이제는 이들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사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분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대로 망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시고,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여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즉, 이들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금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을 보면,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선포합니다.

 

과거 옛 언약은, 두 개의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새롭게 세우실 언약은, 마음에 새긴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이 말씀은, 새로운 언약은, 과거와 같이 외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새로운 언약은, 과거 돌판 속에 갇힌 죽어 있는 형식적이 아닌, 이제는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는, 살아있는 능력이란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예례미야를 통해, 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과거와 같이 모세나 다른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이 것이 아닌, 이제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여 알게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그들을 여전히 구원하시는 분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비록, 하나님은 옛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잠시 고통에 거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분은 이들을 다시 회복시킬 길을 친히 마련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약”이란 말을, 그의 생애 중에, 오직 한 번,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면서, 사용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 피로 세운 새 언약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이에 대하여 마태복음  26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제 이 새 언약이,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세워짐으로써, 우리는 어떤 중재자나 혹은 희생물이나 공로에 근거하지 않고,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음을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의 언약은 하나님의 중재자인 모세를 통해, 속죄의 제사를 드려 사람들의 죄를, 반복하여 없애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온전히 해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새우신 새 언약은, 이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 졌으며, 그렇기에 단 한번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공로를 힘입어, 이제는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집니다.  바로, 예수님 보혈을 통해 이루어진 새 언약은, 우리를 과거의 죄악에서 완전히 단절시키고, 이제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심령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를 늘 소유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중요한 한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기억”입니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오늘 지금 여기서 다시 현실로 재현되어서,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 빚 진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데나리온과 달란트는, 신약 시대의 화폐 단위로, 1데나리온은 일반인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한 달란트는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요?  한 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으로, 6000일, 즉 16년간 한푼도 쓰지 않고 온전히 모아여 만들어지는 큰 돈이었습니다.  1 달란트도 이렇게 큰 돈인데, 그것의 만 배인, 일만 달란트의 가치는, 그야말로 헤아릴 수 없는 천문학적 돈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렇게 큰 돈인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의 큰 은혜로, 모두 탕감을 받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즉,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라트의 빚은 진것 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은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러한 큰 죄를 아무 조건 없이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가, 자신에게 고작 일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그 빚을 당장 갚으라고 재촉하며, 며칠만 시간을 더 달라고 하는 그 사람을, 옥에 가두게 됩니다.  즉, 자신은 16만년 동안 한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하는 일만 달라트를 탕감받았으면서도, 자신에게 겨우 100일정도의 품삯에 해당하는 100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던것이 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은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자를 다시 불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삭쳐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자의 문제는, 자신의 큰 죄를 용서받았음을 금방 망각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매순간 그의 마음 속에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있었더라면, 그는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 진자를 매몰차게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빚을 값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의 형편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오히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모두의 본능과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먼저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이 은혜와 사랑을 돌과 같이 마음에 새겨 늘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받은 자의 삶이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삶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일만 달란트와 같은 큰 죄를 탕감 받은 우리가,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우리 마음에 있지는 않으신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점점더 멀어지고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사순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력이라는 말 자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고난, 죽으심,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에 관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며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죄악 된 삶을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과거의 어리석음을 깊이 기억하고,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새 언약의 피를 기억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이 땅에서 온전히 실천하며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살리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형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죄하고, 판단하기에 사람을 죽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게 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금 죄와 사망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신 새 언약은 서로를 포용합니다.  용서합니다.  그리고 인정합니다.  또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습니다.  늘 우리 삶에,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생각과 삶의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죄로 인해 파멸당하고 심판 받아 마땅한 우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신의 독생자 아들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같은 큰 선물을 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고 감사함으로써,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새로운 주님의 생명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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