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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0 / 토요 새벽 기도회 (로마서 5:6~11)

오늘도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과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 크게 놀라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하고 무능한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알지 못하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깊이 깨달아 알기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시한번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오늘 본문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어려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가 닥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시는가?”, “하나님이 나를 이토록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라고, 의문과 원망 섞인 호소를, 하나님을 향해 던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있는 분명한 이유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의심과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언제 죽으셨는지를 볼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가 여전히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거나, 혹은 어떤 애통하는 진심 어린 회개나 선한행위가 있던 때가 아닌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선듯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사람들을 찾아 보기 힘듭니다.  물론 간혹가다 이러한 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이타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암울하고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 속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그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죽어 마땅한 죄인을 위해,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수, 다시 말해, 몇 번을 죽어 마땅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친히 돌아가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고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방 그리스도인들보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여전히 무능하고, 경건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먼저 죽으셨음을 강조하며,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 없이,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서 마땅히 동일하게 심판 받아야 할 자들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 뿐만이 아닌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허락한 주님의 사랑은, 어떠한 조건과 제한도 없는, 무조건적 사랑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려서 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 성경을 잘 아니까, 기도를 많이 하니까, 헌금을 많이 하니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를 아무런 이유 없이 먼저 다가와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랑하셨기 때문에, 고난의 십자가를 친히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차가운 무덤에 기꺼이 누우셨던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통해, 우리에게 깊은 물림을 주었던,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예일 대학과 하버드대 교수를 거치면서도, 끊임없는 삶의 불안과 회의감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초대를 받아 지적 장애인들로 구성된 라르쉬 공동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큰 영적 각성의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즉, 사람들이 헨리 나우웬에게 “당신이 누구 입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예일대를 거쳐 지금은 하버드대 교수를 맡고 있는, 헨리 나우웬 이라고 소개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반문을 합니다.  “예일대가 뭔데요?  하버드대는 또 뭔가요?”  교수는 무슨 직업인가요?”  헨리 나우웬은 지성인들이 공부하기 위해 가는 학교가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이고, 자신은 그곳에서 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라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또 이러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왜 하는 겁니까?  지성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 때, 헨리 나우웬은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고자 사용했던, 세상의 모든 말들이, 아무 의미 없음을 알게 되었고, 마치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을 포장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과도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후, 그는 이 사건을 통해, 그 동안 겪고 있던, 깊은 영적 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세상의 큰 성공과 명예를 얻었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록 실패로 가득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 모두를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자녀로 먼저 삼아 주셨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어떠한 요소도 갖추지 못했음을, 분명하게 인정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나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에는, 그 어떠한 이유도, 조건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난주간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주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셨음을 깊이 새기고, 감사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영적으로 무능하고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해 주셨으니, 이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는, 세상의 어떠한 구별이나 차이가 무의미해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혈통이나 학연, 문화나 재산, 사회적 지위 등, 각종 기준에 따라 서로를 나누고 차별하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 모든 장벽들이 무너져 화목하게 되었고, 새롭게 구원받은 존재들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서로 화목하고 함께 기뻐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솔직히 돌아보면,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교회 공동체 내에도, 인간적 조건과 기준을 따라, 서로가 나뉘고 반목하는 일들이 일어남을 보게 됩니다.  바로, 주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교회 안에서, 마치 누가 크냐며 논쟁을 벌였던 제자들 같이, 경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는 예수님처럼 다른 어떤 조건도 내세우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자들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3가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구원입니다.  본문 속의 우리는, 아직 연약하고 경건하지 않은 자이며, 죄인이고 원수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화목하게 하시며, 구원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자비이며, 사랑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우리는, 하나님뿐만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이웃들과도 화평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시고 말씀하신 화평은, 세상의 화평과는 다른 것입니다.  당시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의 평화, 로마의 화평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화평은, 칼과 창으로 정복한 무력적인 것으로서, 반대자들을 모두 제거하고 이룬, 약육강식과 같은 평화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신 평화는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신, 독생자의 희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로 화평을 이루는 자들은, 하나님께 아무런 공로와 값없이 받은 은혜와 화평을 누리며, 이것을 기쁨으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구원과 영생을 받은 하늘의 백성들로서, 이들이 할 일은, 오직 주님의 뜻과 말씀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나누며, 존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셨던 것을 기념하는, 마지막 고난주간인  토요일 오늘,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의 고백을 드리길 소원합니다.  또한, 그 사랑을 먼저 받은 자들로서, 마땅히 그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저하지 말고 찾아가, 조건 없이 그 사랑을 베푸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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