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Worship
주일설교
토요 새벽 설교
교회주보
주일설교

2024.3.24 / 선한 일로 동참하라! (마가복음 14:1~11)

할렐루야!  오늘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면서, 동시에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놓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사실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장차 크고 강력한 군사를 일으켜, 단숨에 로마를 정복하고, 과거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와 같은, 영화로운 이스라엘을 새롭게 건설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철저히 실패한 모습의, 고난 받는 메시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이미 계획하시고 예정하셨던 것으로서,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본격적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수난의 발걸음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에 동참하는, 3가지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어떠한 모습과 자세로 동참해야 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대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과 2절을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월절과 무교절의 큰 명절이 다가오는 시점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면, 혹시라도 민란이 일어날까 걱정하며,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유월절과 무교절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던 사건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 당시,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가정에, 죽음의 영이 “넘어간”(pass over)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급하게 나오면서, 누룩 없는 떡을 먹었던 사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사실 유월절과 무교절은 동시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이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생생히 기억하도록 이끄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은 기억하고 기념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단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순간으로서, 그동안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함께 모여 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있고 뜻깊은 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책을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계획은,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산헤드린 공회원에 의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방해가 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지속적으로 계획을 세워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계획은 매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큰 명절을 앞두고, 그 동안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랐던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기에, 혹시라도 자신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면 반란을 일으킬까봐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사건을 상세히 기록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수난 사건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이들도 장차 펼쳐질 예수님의 수난 사건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은, 선한 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닌, 악한 일로 동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는 관심조차 없이,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을 어떻게든 보호하고, 유지하며, 공고히 다지고자,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 모습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면, 하나님조차 버리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같이, 우리의 기득권에, 방해가 될 것 같은 예수님을, 우리 삶에서 지속적으로 제거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본능적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쌓아 놓은 체제를, 단숨에 무너뜨리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살아왔던 모습과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우리 인생이, 마마 헛된 것처럼 여겨져, 큰 자책감과 좌절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동안 힘들게 쌓아 놓은 것을 허무는 것은, 곧 죽음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서 더욱 멀어지게 하는, 잘못된 고집이요 아집과 같습니다.  결국 생명의 길인 줄 알고, 열심히 마지막까지 달려 갔지만, 그 마지막에 영원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면, 그 얼마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대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자기들이 세운 기준과 확신, 그리고 자신들의 모든 이기심과 욕심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 앞에서 겸손히 내려 놓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 역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부정적인 도구로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무엇을 잘못하고, 내가 어떤 부분이 약한지, 늘 깨어 주님의 뜻과 말씀에 비추어 보아여 합니다.  또한, 아무리 살펴보아도, 도무지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다면, 겸손히 주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부정적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또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도구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 우리의 판단, 그리고 우리의 고집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판단 그리고 계획을 주님 앞에 내려 놓고, 겸손히 주님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주님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선한 모습과 생각으로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번째는 가룟 유다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10절과 11절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명인 가룟 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의 뜻과 생각 그리고 말씀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돈을 받고 스승인 예수님을, 기득권 세력들에게 넘겨주려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을 미루려 했지만, 가룟 유다를 통해 성공하게 됩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자 결심했는지, 그 이유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6장 14절~16절의 말씀을 보면, 가룟 유다가 먼저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길 테니 얼마를 줄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종교 지도자들은, 은 삼십을 달아서 그에게 건네게 됩니다.  그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은,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가룟 유다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는 하되, 대단히 부정적 모습과 자세로 동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러한 가룟 유다를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분명,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부르실 때, 신중하게 부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부르셨을 때, 이미 그가 자신을 팔 자임을 처음부터 아셨다라고, 요한복은 6장 63~6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가룟 유다를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를 재자로 받아들이신 이유는, 아마도 그가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택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그에게 일종의 기회, 다시 말해, 부정적이고 악한 일이 아닌, 선한 일로 구원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보다 여전히 세상에, 특히 돈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을 때에, 곧장 돈의 관점을 투영하게 됩니다.  즉, “그는 화를 내며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라고 투덜거립니다.  그렇지만 그의 본심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아닌, 돈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원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없는 말을 만들어 내게 되었습니다.  즉,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돈이 자리잡고 있었고, 모든 판단이 돈의 여부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된 편견은 심지어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만의 판단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입니다.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가룟 유다는, 세상적 욕심에 사로잡혀, 부정적인 역할로 주님의 구원 사역에 참여한, 안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가룟 유다의 모습이 아닌,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왜곡되고 편협한 시각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세운 잘못된 판단 기준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왜곡된 인식의 틀을 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과 내 판단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겸손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의견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같이 부정적인 역할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아닌, 선한 일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여인이 값진 향유, 곧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으니, 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들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비난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녀가 행한 일이,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 아름답게 전해질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모습은, 종교 지도자들의 계략과 가룟 유다의 배반 음모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녀는 종교 지도자들과 가룟 유다와 같이, 부정적으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모습이 아닌, 긍정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음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선한 행실로 구원 사역에 동참하였습니다.  지난주 설교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1 데나리온은, 그 당시 남성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그렇다면 300데나리온은, 남성이 휴일을 제외하고, 열심히 1년동안 아무런 지출 없이 일하여 벌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여성의 신분이었다면,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 동안, 자신이 소중히 모든 재산으로, 향유를 구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세상적 관점에서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까운 향유를, 예수님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단숨에 깨어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가, 장차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준비하는,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과연 주님께 우리의 것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철저히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으로부터 비우고, 그후 겸손히 나누고, 행동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사역에,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동참하도록 인도하셔서, 아름답게 열매 맺으며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헌금을 드리고, 우리 이웃들의 필요를 섬기고 나누는 행동들이, 때로는 낭비로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분명 그것을 기억하고, 반드시 자라나게 하시어, 장차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절기, 우리는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시길 원하십니까?  부정적인 모습으로 참여하시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선하고 아름다운 긍정적인 모습으로 참여하시길 원하십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끊임없이 계략을 세웠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견고한 틀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해, 예수님을 철저히 거부했습니다. 또한 돈과, 자신의 기준과 판단에 사로잡힌, 가룟 유다를 통해,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악한 일을 통해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한 사람들이었 습니다.

반면, 한 이름 모를 여인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리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그녀가 드린, 비움과 나눔 그리고 섬김의 헌신이 기억되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것을, 신앙의 가장 기본 원리로 삼고, 항상 최선을 다해서 섬기며, 나누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일로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한 인물로 마지막까지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도, 긍정적인 모습으로, 주님께 드릴 줄 알아, 선한 일로 주님의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우리들의 섬김이 아름답게 전파되고 기억되기를,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This entry was posted in 주일설교. Bookmark the permalink.
No.TitleWriterDate
393 2024.4.21 / 충만의 삶이란? (시편 23:1~6) 웹 관리자 2024.04.27
392 2024.4.14 / 증인의 삶이란? (누가복음 24:36~49) 웹 관리자 2024.04.20
391 2024.4.7 / 어디를 향해 가십니까? (누가복음 24:13~35) 웹 관리자 2024.04.13
390 2024.3.31 /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복음 20~1~18) 웹 관리자 2024.04.06
389 2024.3.24 / 선한 일로 동참하라! (마가복음 14:1~11) 웹 관리자 2024.03.30
388 2024.3.17 / 새언약을 맺으리라! (예레미야 31:31~34) 웹 관리자 2024.03.23
387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웹 관리자 2021.06.26
386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웹 관리자 2021.06.19
385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는 이 웹 관리자 2021.06.12
384 우리가 속상할 때 웹 관리자 2021.06.05
< Prev 1 2 3 4 5 6 7 8 9 10 40 ... Next > 

1049 Davis Grove Rd, Ambler, PA 19002 | (215) 542-5686 | pfkumc@gmail.com
Copyright © 2014 All right reserved. Powered by LSK Communication, In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