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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6 / 토요 새벽 기도회 (열왕기상 2:13~25)

오늘도 예배에 참여신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E. H. Carr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의 책에 보면, 역사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다.” 참 유명한 말입니다.  과거란 글자 그대로, 이미 지나간 일들이며, 지금은 사라져 없으니,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과거에 남겨진 여러 흔적과 유물 그리고 자료들입니다.  비록 이것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말도 직접적으로 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나름대로의 질문을 가지고 다가가면, 자연스레 우리의 질문에 대화로서 답을 들려줍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크게 2가지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신명기 역사이고, 다른 하나는 역대기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때로는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두 차량이 교차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을 때, 서로 상대방이 가해자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상대방 각각의 이유를 들어보면, 공통점 하나가 발견됩니다.  그것은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그 사건을 해석하기에, 결론이 전혀 다르게 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해석할 때에도, 저마다의 기준을 가지고 해석하기에,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사관이라 부릅니다.

 

먼저 신명기 역사서 혹은 신명기 사관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십계명 율법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율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장차 복과 저주가 임할 것임을 말씀합니다.  성경에서 신명기 사관이 담겨져 있는 말씀은, 신명기로부터 시작하여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역대기 역사서 혹은 역대기 사관은, 하나님이 다윗의 집안과 맺은 계약을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궁궐에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천막에 계신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성전 건축을 계획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전 건축을 허락치는 않으셨지만,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그와 새로운 계약을 맺게 됩니다.  그것은 신명기 사관과 같은 조건적 계약,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지키면, 그에 합당한 복을, 그렇치 않으면 저주를 내리는 것이 아닌, 이것은 일방적 계약으로, 하나님이 다윗과 그 후손을 견고히 하시겠다는 무조건적 약속입니다. 성경에서 이 말씀을 역대상과 역대하에 등장합니다.

 

사실 이러한 역사관은, 어떤 것이 옳고 혹은 틀렸다가 아닌,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 사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새로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상황 속에서 등장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부푼 기대와 다른 한편으로 고민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들로 인해,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방의 타락한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경계하고자, 신명기 역사서는, 율법 준수를 철저히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와는 다르게 역대기 역사서 혹은 역대기 사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은 이후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과거와 같이, 꿈과 희망으로 부풀어 있는 삶이 아닌,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모든 것이 폐허와 쟂더미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절망 속에서,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크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들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과거 하나님과 다윗 가문이 맺은 언약을 강조하며, 이같은 약속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금 부흥하여 번성하게 될 것임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큰 이해 속에서 성경을 읽어 내려 간다면, 우리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더 큰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열왕기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허락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왕들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즉, 신명기 사관을 가지고, 이스라엘 역사와 그 속에서 활동한 왕들을 철저히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열왕기상은, 다윗왕정의 말기 상황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솔로몬의 왕위 승계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자와,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자의 모습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직전의 상황을 보면, 솔로몬은 왕위에 등극하게 됩니다.  하지만 왕이 될뻔한 아도니아는, 겉으로는 자신의 동생 솔로몬을 왕으로 인정는 척 했지만, 내심 왕권을 자시 가져올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처벌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솔로몬의 배려와 포용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아는 재앙을 부르는 악행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맞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도니아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악행은 무엇이었는지,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도니아는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한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솔로몬의 치세가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왕위 등극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던 아도니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악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그는 밧세바를 찾아가, 수넴 여인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도와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소원을 말하기 앞서, 깊은 내면에 자리 잡은 야심을 스스럼없이 드러냈습니다.  즉, 그는 밧세바를 향해, 이스라엘은 본래 자신의 왕국이며, 온 백성들도 자신을 통치자로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갑자기 솔로몬에게 왕위를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말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여전히 굴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아도니야는 솔로몬이 베푼 자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품었던 악한 생각을 전혀 바꾸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치밀한 계획과 계략을 통해, 크게 키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악한 말과 행동은, 늘 악한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즉, 생각이 악하면, 그 사람의 됨됨이도 악하다고, 잠언 23: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생각과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단호히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 우리의 모습이 악한 말과 행동으로, 불현듯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도니야는 은혜를 망각하고 악한 생각을 품고 살아갔습니다.  그의 악한 생각은 마침내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고, 그 결과 죽음이란 형벌을 피할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하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은 보면, 악을 무시하고, 때로는 이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며, 행하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관리되지 않은 땅에 금방 잡초가 뿌리를 내리고 급속도로 퍼지듯이, 악은 우리 마음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금방 모든 곳으로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22에서,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행동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늘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합당한 것을 생각하고, 아무리 급박하고 절박한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상황을 분별해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내를 여지없이 들춰 내시고, 우리를 바르게 세워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악한 생각을 지적하실 때에, 우리는 지체 없이 그 악한 생각에서 돌이킬 수 있는, 늘 겸손한 마음과 생각으로 준비되어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로, 아도니야는 자신의 악한 생각을, 지체없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도니야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했던 이유는, 다윗왕의 젊은 첩을 아내로 삼아, 다시 한 번 이스라엘 왕의 후계자로서,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계획을 세우고, 그는 먼저 밧세바를 찾아가, 솔로몬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게 됩니다.

 

아마도, 아도니야는 밧세바가 솔로몬왕의 어머니로서, 왕을 만나기 쉽다는 것과, 동시에 비록 왕의 신분이지만 어머니의 간청을 쉽게 거절하기 힘들 것을, 치밀하게 예측하여, 이와 같은 간계를 부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계획대로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간청을, 솔로몬에게 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악한 계략을 간파한 솔로몬은, 어머니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의 모든 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그에게 죽음의 형벌을 내리게 됩니다.  즉, 아도니야는 자신의 욕심과 야망에 눈이 멀어 결국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야고보서 1:14은, 사람이 함정에 빠지고 재앙을 당하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즉, 욕심이 결국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파멸적 죽음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앙이 우리 삶에 찾아오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을 다스리고, 그로 인하여 욕심을 채우려는 모든 행동들을 반드시 멈춰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를 쟁취하도록 우리를 늘 부추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세상의 미혹과, 우리 내면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부터 미끄러지게 된다면, 아도니야처럼 우리 삶에 재앙을 불러들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에게, 아도니야의 재앙적 죽음은, 악한 생각과 악한 행실을 따라간 사람의 최후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당장 눈앞에 놓인 욕심과 욕망을 따라 생각하고, 주저없이 행하는 모습이야 말로, 곧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무서운 악이며, 위협적인 재앙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적 욕심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기에, 날마다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살피고, 우리의 행동이 늘 그러한 욕심과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악행에서 멀어지는 삶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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