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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31 / 내가 주를 보았다! (요한복음 20~1~18)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영어로 부활절 인사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기쁨이, 성도님들과 그 가정에, 늘 충만하시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시대는, 과학적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이 말은 철저히 이성적 판단과 그에 대한 합리성이, 우리의 삶을 이루고 지탱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과학과 이성, 그리고 그로인한 합리성을 중심으로, 만약 이해되지 않고, 증명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학만능주의가 우리 삶의 척도가 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해되지 않고 합리적이지 못하게 느끼는 신비는, 모두 미신과 같이 여겨, 제거하려는 성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의 영역은 점점더 사라지고, 오직 과학적 논리와 그로 인한 합리적 판단을 중요시하는, 우리의 이성만이 우리 신앙의 핵심 요소로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도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우리 연합 감리교에는 4가지 신학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전통, 이성 그리고 경험입니다.  이 네 가지는, 동일한 수평적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 성경을 가장 중심에 두고, 전통과 이성 그리고 경험이, 성경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의 화분을 떠 받치고 있는 3개의 다리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 신앙의 제일 중요한 원리로서, 우리는 과거 믿음의 다양한 전통, 여러 신앙적 생생한 경험, 그리고 우리의 합리적인 이성적 판단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달에 한번 고백하는 교리적 선언 5번을 보면,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앙과 실행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는다”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제일 기준이요 원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성경의 자리에 이성이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 말씀 앞에서, 점점더 겸손해지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앞세우게 되었습니다.  물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근거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100%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숨은 뜻과 깊은 생각 그리고 그분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이성만을 근거로 판단하게 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느 순간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이전에 내려오는 전통들과, 자신들 경험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들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만을 앞세웠기에, 정작 그들이 바라보아야 할 중요한 것들을 바라보지 못한 안타까운 모습이 등장합니다.  즉, 그들 앞에 펼쳐진 놀라운 일에 대해여, 이들은 편협한 생각과 사고 그리고 판단으로 인하여, 그 누구보다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의 삶에 중심이 아닌, 전통과 이성 그리고 경험들이 이들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일어난 사건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아직 날이 밝지 않은 때에, 집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이 계신 무덤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오는 본문에는 마리아 한명만이 등장하지만, 다른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마리아와 야고보의 모친인 마리아, 요안나 그리고 다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다른 이들이 다 잠들어 있는 이른 시간, 주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로마의 반역자로 처형된 예수님을, 어떻게는 다시금 방문하여, 이들의 애통한 심정을 달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점에 있어,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마리아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은, 대단히 용감한 여성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이 방문한 곳에, 예수님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급히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는, 급히 나와, 서로 경쟁하듯 무덤으로 힘껏 달리게 됩니다.  베드로 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제자는, 무덤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있지 아니하고 다른 한 곳에 개어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과거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사로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즉, 나사로는 삼베에 묶인 채, 얼굴에는 수건을 감싸고 걸어 나왔습니다.  엄밀히 말해, 이 모습은 부활이 아닌 소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게, 그를 싸맸던 세마포와 수건을 온전히 남겨두시고, 일시적인 육체적 소생이 아닌, 이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과 방식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빈 무덤에 들어가서, 이 모든 사실을 보고 확인하며 믿었다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믿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후의 말씀을 보면, 이들은 빈무덤 앞에서, 여전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반드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해,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시신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저 이 사건으로 인해, 이들은 당혹감을 느끼며, 착잡한 심정으로, 자신들이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제자들과 함께 빈 무덤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서 여전히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정신 없이 울던 그녀는,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 보게 됩니다.  그때 흰옷을 입은 천사 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의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쪽에 있었습니다.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왜 울고 있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마리아는 깊은 슬픔으로 인해, 두려움도 잊은 채, 천사들을 향해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어디에 그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마리아가 뒤로 돌아서자, 예수님이 그곳에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여기서 “누구를 찾고 있느냐?”의 예수님의 질문은, 요한복음 서두인 1:38절에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하신 말씀입니다.  즉, 그 당시 예수님을 쫓아간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을 잘못 이해한 상태로 그분을 따라가고 있었고, 그 때 예수님이 이들을 향해, 누구를 찾고 있는지 물을 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향해 “누구를 찾고 있느냐”라고 질문하신 이유도, 마리아 역시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그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의 대화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마리아는 그가 동산을 관리하는 사람인 줄 알고, 그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을 건내게 됩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이곳에 계셨던 예수님을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내게 말해 주세요.  내가 그분을 모셔가겠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은 목자가 양을 부르듯, 마리아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그러자 마리아는 목자의 음성을 알아들은 양과 같이, 즉시 돌아서서, “라브니, 즉 선생님”이라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에게 가까이와 손을 대려 하는 마리아를 멈추게 하십니다.  이 모습은, 지금 당장 마리아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닌, 이 소식을 당장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적 방법인, 보고, 만지고, 느낌으로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신앙과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체험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신비한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만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보았다고 외치게 됩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음을 담대히 전하게 됩니다.  바로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그의 애통하는 마음이, 이제는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음 예수님의 제자들과 마리아는, 자신들의 편협한 사고에 갇혀,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도 그리고 바라보지도 못했습니다.

 

솔직히 이러한 모습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번 확고히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셨지만,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 팽배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합리적 판단과 이성적 논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죽은 사람이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이성의 충돌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논쟁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믿어야 보이느냐 혹은 보이면 믿게 되느냐의 논쟁입니다.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혹은 달걀이 먼저냐의 논리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닭이 먼저냐 혹은 달걀이 먼저내의 고민은 더 이상 고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1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들을 지으셨다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닭이 먼저인 것입니다.

 

사실 이성을 강조하고 있는 과학적 논리도, 자세히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전제하고 있는 저마다의 확고한 믿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북극과 남극은 늘 춥고, 적도 지방은 늘 더울 것이란 믿음이 있어야, 앞으로의 날씨와 기상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북극과 남극은 예전과는 다르게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고, 적도 지역에는 눈과 우박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과학자들은, 이러한 믿음의 변화로 인해, 앞으로의 기상을 이전과 같이 예측하지 못하였고, 여러 지역에 이상 기후로 표현되는 이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자신들이 늘 그러할 것이라 믿어 왔던 믿음이 깨지자, 과거의 과학적 예측과 논리도 단번에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사실 종교와 과학은 그 출발점에 있어서, 확고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 믿음을 통해, 나름대로의 논리와 체계를 세우고, 그 안에서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우선적 믿음을 보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과학적 판단과 사고만을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해되지 않으면, 결코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과거 수많은 비극적 전쟁과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 인간의 이성과 판단이 얼마든지 잘못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여전히 과학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 삶에 신비, 다시 말해, 부활의 믿음이 전혀 자리할 공간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의, 가장 큰 착각이요 문제인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수도 있겠다라고, 우리의 이성과 판단으로 추측할 수 있는 빈무덤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그분의 부활을 비로소 믿게 되었습니다.  불현듯 자신의 삶에 찿아온, 주님과의 온전한 만남을 통해, 이제 마리아의 모든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의 걱정과 근심은, 이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고백과 찬송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과 지성 그리고 능력과 판단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으로 겸손히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에 오늘도 찾아오고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분명하고 명확히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여기서 인격적 만남이란, 예수님을 그저 나와는 동떨어져 있는 종교적 스승이나 지도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지금 나의 옆에서, 늘 나와 함께 걸어가고, 나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그리고 함께 해쳐 나갈수 있는, 친구와 같은 때로는 부모나 배우자와 같은 구체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부활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부활의 기쁨을 누리시 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가 아닌, 앞으로도 매순간 이러한 기쁨에 동참하시길 소원합니다.  부활의 기쁨이 단순히 구호나 교리적인 이해가 아닌, 나의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나의 비즈니스 안에서, 내가 만나 대화는 사람들을 가운데서, 나의 고객들과 주변 이웃들을 통해, 말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예배를 통해,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고 매순간 확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주님을 찾고 만나길 원한다면, 분명 마리아에게 찾아가셨던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이 순간 우리 모두에게도 찾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찬양에서도 고백했던 것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시길, 그리하여 내가 사모하는 예수님의 음성 조차도 반갑고, 그분이 늘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이 되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족히 거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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