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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4.7 / 어디를 향해 가십니까? (누가복음 24:13~35)

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사순절 동안, 매일같이 성경필사를 하였습니다.  솔직히 처음 제가 성경필사 책을 만들 었을 때, 그 내용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그래서 참여하시는 분이 적으면 어떡하나, 내심 걱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많이 참여하시기를 바라며, 모든 책마다 기도하는 마음을 담아, 여러분들의 성함을 써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 성경필사에 참여하신 분들을 종합해 보니, 총 11분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성경필사에 기쁨으로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리며, 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혹시라도 성경필사 기간 여러분들이 받은 은혜를,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저에게 꼭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나눔의 시간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축도 후에 제가 제단 앞에 있겠습니다.  성경필사 하신 분들은, 자신의 책과 교회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믿음의 사건 하나를 선택하라면, 그것은 단연코 부활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동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해 부활절은 아주 중요한 교회의 절기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믿음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일년에 한번 부활절에만 기념하고 마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매주일 마다 우리가 기념해야 하는 사건이고, 더 나아가 우리 삶의 매일 매일, 그리고 매순간이 부활의 믿음과 소망 속에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활절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역사적으로 부활절이 공식적인 교회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 제국에 의해,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전의 초기 기독교 성도들은, 예수님이 지키라고 말씀하신 성만찬을 통해, 매주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이나 그 밖에 신약 성경들을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 교인들은, 처음에는 유대교 관습을 따라 안식일, 즉 토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다가, 그 후에 차츰 안식 후 첫날, 즉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예배로 모이는 날로 바뀌어 지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1장에 보면, 이러한 전통은 이후, 안식 후 첫날을 “주의 날”로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초기 기독교 성도들은 일요일을 “주의 날” 바로 주일이라고 부르며, 그 날에 함께 모여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고 함께 찬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나서, 부활절이 하나의 교회 절기로서 정해지고, 큰 행사로 지켜지면서부터, 매주일이 부활 주일이라는 인식이 점차 희박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모진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믿음의 사람들 안에 끊임없이 살아 숨쉬고 있던 부활의 소망과 능력이, 이후로는 점차 힘을 잃어갔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대의 기독교가 다시금 초대 교회의 순수성과, 역동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일년에 한번 부활절을 지키는 것이 아닌, 매주일 그리고 매순간, 우리 삶 속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그분의 뜻과 말씀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 부활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먼저 구약성경을 보면, 창세기 12:2~3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즉,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장차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다른 민족들을 다스리게 하실 것이란 약속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이루어 졌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주변 모든 국가들이, 때를 따라 비단과 보석을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마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계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심지어 지금은 남아메리카 에디오피아 지역으로 알려져 있는 시바 나라의 여왕이, 온갖 보물을 싣고 솔로몬을 찾아와서, 그의 지혜를 찬양하고,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순간은, 고작 100년정도 밖에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솔로몬 이후, 통일 왕국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게 되었고, 결국 이들의 범죄로 인해 두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먼저 패망하게 되고, 그후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패망하여,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진심 어린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생활을 마치고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쟂더미로 변한 성전과 고향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든 힘을 내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이들의 노력은 번번히 주변 세력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점차 과거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그리워하며, 과거 자신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하나님이 친해 보내셨던 선지자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후, 신약의 시대로 넘어와, 비로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삶은, 여러 번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믿은 선지자들을 통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 반란들은 모두 실패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참 선지자가 아닌 거짓 선지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침에는 분명 이전의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힘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분이 진정, 이전의 거짓 선지자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이신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반갑게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일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로마의 권력과 결탁하여, 종교적 이들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눈에 새로운 선지자, 바로 메시아의 출현은 그야말로 파멸과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욕망에 눈이 멀어 메시야를 제거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찬란했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그리워 하며, 새로운 메시야는 이 같은 왕국을 새롭게 완성할 것이라 믿고 있었습니다.  즉, 기적을 베푸시고, 능력과 권능을 펼치시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다윗과 솔로몬 때와 같은 강하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회복, 쇠락한 선민의식과 전락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되찾아주는, 해결사로서의 메시아를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그때가 되면, 그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친 예수님 주변사람들도, 한 자리씩 차지하면서, 권력을 움쳐쥐는 기회가 올 것을 대망하며 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메시야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하시고, 로마를 강력한 힘으로 몰아내기는 커녕, 오히려 로마 군인들에게 숱한 매를 맞으며, 온갖 조롱을 당하고, 로마의 반역자로서 사람이라면 가장 피하고 싶은 십자가 형벌을 받아,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제 다윗과 솔로몬의 창대한 시대가 메시아 예수에 의해 다시 펼쳐져 강한 나라가 된다는 희망이나, 소원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따르던 주변의 무리들은 출세는 고사하고, 이제는 반역을 함께 도모한 죄인들로서, 생명조차 위태로워졌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여러 사람들은, 출세, 신분상승, 속된 말로 대박의 꿈을 꿈꿔 왔지만, 이 모든 것들이 깨어지고, 실망감과 절망감을 안고, 자신들의 고향으로 떠나 조용히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생계를 위애, 예수님를 따르기 전에 했던 고기잡는 일을, 씁쓸한 마음으로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에도, 이러한 실망감과 절망감을 안고, 자신들의 고향인, 엠마오로 떠나는 예수님의 두 제자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캄캄한 민족의 앞날과 위태로운 자신들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힘없이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패잔병의 모습으로, 고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보면,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한 여자들이, 무덤이 비었다고 이야기하며, 다시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허황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과거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의 신변을 더욱 위험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란 생각에, 급히 예루살렘을 떠나 자신들의 고향인 안전한 엠마오로 피난을 가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망과 절망의 마음으로, 고향 엠마오로 향하는 도중, 어떤 사람 하나가 끼어들어, 갑자기 셋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하지만 두 제자는, 3년 동안이나 가까이에서 보아왔던,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토록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음성을 알지 못한 채, 함께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제자는 왜 예수님의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첫째로, 이들은 영적으로 무감각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 있었고, 예수께서 다가오실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이들의 모습은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17절에는,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금 이들은, 실패, 실망, 슬픔의 포로가 되어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지금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들로 인하여, 이제 예수님을 따르던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의 영적인 눈이 가려져, 옆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종종 예수와 함께 길을 가면서도, 실패와 실망, 슬픔과 공포에 너무 많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빼앗겨, 눈이 가려져, 결국 옆에 계신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나 집중해야 할 것에 가장 먼저 집중하고, 향해야 할 것에 올바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향해야 함을 기억하시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이요, 또한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선하신 뜻과 생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주변의 상황에 집중함으로, 우리의 정신줄을 잃지 마시고, 언제 어디서나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어, 우리의 생명줄이 되신 주님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집중함으로, 우리 삶의 모든 장애물들을 지혜롭게 넘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로, 이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자신의 기준과 판단으로 인해, 예수님을 철저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다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기대 때문에, 곁에 계신 예수님를 온전히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메시아관은, 오늘 본문 21절에 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들은 예수님께서 정치적 해결사로서 이 땅에서 잠깐의 구원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아들의 희생을 통해, 모든 인류를 영원한 죄와 파멸로부터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지만, 그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알라딘의 램프처럼, 내가 바라고 기대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고 착각해, 그분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보다 더 큰 분이십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 이상을, 늘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참 좋으신 분인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것 보다 더 깊고, 크며, 넓고, 높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들어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바라보게 된다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능히 이길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2~23절에 보면, 어떤 여자들이 말하기를,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평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 이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고 싶지 않은 것들은 철저히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5절에서 이들에게 책망을 말씀을 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 아니냐!”  이들은 선지자나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 않고, 오히려 실패와 실망과 절망과 공포의 마음만을 간직한체, 고향 엠마오로 향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미련한 제자들의 변화를 위해,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성경을 풀어,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27절에 보면 “이에 모세와 및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설명하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설교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다시금 뜨겁게 만들었고, 이제야 비로소 “저희의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라” 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 30절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것을 제자들에게 주고 계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축복기도와 성찬을 통해 그들의 어두운 눈을 환하게 뜨도록 이끄셨던 것입니다.  이제야 예수님을 온전히 알아본 제자들은, 고향 엠마오가 아닌 다시 발걸음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결국 엠마오와 예루살렘을, 세 번에 걸쳐 왕복하였던 것입니다.

첫 번째 여행은,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로 간 것입니다.  이 여행은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시기 전의 예수님을, 자신의 뜻과 생각을 가지고 바라본 여행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들 개인의 바람과 성취가 이루어질 기대하며 예루살렘을 향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여행은, 모든 기대가 절망으로 변하여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오게 됩니다.  즉, 자기들의 기대는 이제 완전히 실패했고, 절망과 공포감, 실망과 좌절, 심지어 죽음의 공포로 가득한 실패의 여행길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여행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즉, 이들은 메시아로서 고난 당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비로소 바르게 깨닫고 이해하여, 결단의 길, 사명의 길, 심지어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의 길을 다시 떠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어 주셨으며, 이들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 발걸음을 돌리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이들의 세 번째 여정은, 힘 있는 발걸음과 결의에 찬 표정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중심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한, 진정한 소망과 사명이 숨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무엇을 위해서, 어떤 발걸음과 표정으로 향하고 계십니까?  지금 각자의 상황이 어떠하신지요?

 

제자들의 첫 번째 여정처럼, 개인의 성취와 그릇된 기대를 위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계십니까?  두번째 여정처럼 , 바라던 일들이 실패하여 절망, 공포에 휩싸여 예루살렘에서 고향 엠마오로 도피하는 여정을 걷고 계십니까?  아니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배와 말씀,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깨달음과 확신으로 결단하여, 힘찬 발걸음과 결의에 찬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난의 십자가 길인 예루살렘을 향해 기쁨으로 나아가고 계십니까?

 

어쩌면 연약한 우리의 삶에는, 이 세 가지의 여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성취, 절망과 좌절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우리에게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인격적으로 만나기만 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희망과 기쁨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달려갈 줄로 믿습니다.  또한 이러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는, 새로운 희망을 주실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말씀과 기도, 예배와 성찬을 통해,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만나고, 그분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결단함으로서, 우리 모두의 삶에, 늘 새로운 희망과 놀라운 역사가 넘쳐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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