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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6.28 / 우리의 시선을 넘어 하나님의 시선으로… (요나 4:1~11)

할렐루야!  오늘도 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자주 “공정함”을 이야기합니다.  만약, 이 공정함이 무너지게 된다라면, 우리 사회는, 불신, 분열, 그리고 구성원들 간에, 깊은 좌절과 울분을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말하는 대부분의 공정함은, 나에게 유리한 공정함임을 보게 됩니다.

 

즉, 내가 용서받는 것은 은혜라 생각하면서도,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 용서받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면서도,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불 같은 심판을 내려 달라고, 마음 한편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한때,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말이 유행했습니다.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멘스,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기적이고 이중적인 삶의 태도, 그리고 선택적 신앙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요나서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숨기고 싶은, 내면의 여러 부끄러운 모습들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거울이 됩니다.  사실, 요나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큰 물고기 이야기가, 그 핵심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오늘 4장 말씀에서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니느웨보다, 오히려 요나의 완고한 마음을 변화시키길, 강하게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오늘 본문 속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심판을 거두셨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가장 기뻐해야 했지만, 오히려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의 솔직한 내면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역시 어떠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 사람들과 세상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여러분들과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 내 판단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왕부터 백성, 심지어 짐승들까지 금식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들을 향한,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뻐하며,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기뻐해야 할, 하나님의 선지자가, 그 누구보다 가장 크게 화를 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히브리어 원문을 살펴보면, 더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요나가 이를 큰 악으로 여겼다”라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이것은 “악행이다”라고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신 줄, 내가 알았습니다.”

 

여기서 요나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과연 누구에게 허락할 것인지를, 하나님이 아닌, 자기 스스로가 결정하려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은 절대 안 됩니다.”  “저 민족은 안 됩니다.”  “저 사람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우리 민족을, 우리의 형제, 자매, 그리고 자녀들을, 처참하고 잔인하게 학살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모습은, 요나 뿐만이 아닌,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는 그토록 관대하던 하나님의 은혜가, 다른 사람들로 향하게 되면, 여러 조건이 붙게 됩니다.  “저 사람은 아직 회개가 부족해.”  “저 사람은 너무 큰 죄를 지었어.”  “저 사람은 아직 용서받으면 안 돼.”

 

그런데, 하나님은 이 같은 우리의 생각에,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이 은혜는 너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 속에는, 아침일찍 부터 일한 사람도, 9시에 온 사람도, 12시에 온 사람도, 심지어 저녁 5시에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만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침 일찍 일한 사람들이, 주인을 향해 크게 화를 냅니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다.”  그러자, 주인은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너는 나를 악하게 보느냐….”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힘과 우리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무언가의 대가나 결과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자격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전혀 받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의 전적인 의지로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의 현실적 논리와 계산을, 훌쩍 뛰어 넘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마음에, “저 사람은 절대 안 된다.”  “나는 저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같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없다.”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혹은, “내 생각에, 내 기준에, 그 누가 뭐라 해도, 이것만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이 같은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불평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 모두에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우리도 니느웨 백성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바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를 용납하고, 서로를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나만 소유한 삶이 아닌, 끊임없이 우리 주변과 세상으로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믿음의 백성들은, 이제 나의 생각과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나의 관점과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이 나의 편이 되어 달라고, 떼쓰는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살아도 죽어도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서, 마지막까지 살아가야 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관심은, 심판보다, 생명을 향해 열려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나는 성 밖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혹시 내가 불만을 강하게 터트리면, 하나님께서 이제라도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박넝쿨 하나를 준비하십니다.  이제, 땡볕에 있던 요나에게, 그늘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는 크게 기뻐합니다.

 

그런데 다음 날, 벌레 하나가, 무더위 가운데 자신의 그늘이 되어준, 박넝쿨을 모두 갉아먹었습니다.  게다가 뜨거운 동풍까지, 자신을 향해 불어옵니다.  그러자, 요나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하나님을 향해 다시 한번, 강한 불만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놀라운 질문 하나를, 요나에게 던지십니다.   그것은, 지금 “네가 박넝쿨 때문에 화내는 것이 옳으냐?”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내가 지금 옳으니이다.”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이 상황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요나는, 박넝쿨 하나 때문에, 죽고 싶다라고 말하면서도, 니느웨의 12만 명이, 하나님 심판 받아 죽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다라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는 지금, 12만의 생명보다, 박넝쿨 하나를, 더 아까워했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러한 요나의 비정한 모습을, 우리가 강하게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역시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손해에 대해서는 대단히 민감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물과 아픔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감각합니다.  전쟁으로 인하여 기름값이 오르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만, 전쟁 속에서,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무관심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오늘 하나님깨서는, 요나의 모습을 통해, 이러한 우리의 죄악 된 모습 역시, 강하게 깨뜨리길 원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제자들은 맹인을 보며, 이렇게 묻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  여기서, 제자들은 맹인이 처한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람, 그 자체를 바라보셨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는, 이제 성령으로 새롭게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병자를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들이 “주목하여” 그 병자를 바라 보았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과거에는 원인을 찾던 눈이, 이제는 긍휼의 눈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시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우리 주변 이웃들의 무엇을, 가장 먼저 보고 있습니까?  직업입니까?  학벌입니까?  정치 성향입니까?  국적입니까?  실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천하보다도 귀히 여기시는, 생명 자체를 보고 있습니까?

 

나의 유익과 이익보다, 지금 내 옆의 한 영혼을, 더욱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길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그분의 시선을, 온전히 소유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긍휼은 모든 사람들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요나에게 이 같은 질문하십니다.  “내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어찌 옳지 아니하냐?”  이 질문으로, 요나서는 끝이 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에 대한 요나의 대답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질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인간들은 쉽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바꾸지 않습니다.  우리의 편협한 시선은, 더더욱 변화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시기 보다, 오히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그것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마음입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시는 마음입니다.  바로 어떻게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시고자 하시는, 긍휼과 자비의 마음인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 『방탕한 선지자』란 책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사람은, 이제는 더 이상, 그 누구보다, 우월하다라고 생각할 수 없다.”

 

전적으로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경험하면, 우리의 교만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높고 깊은 은혜를 경험하면, 이제 우리의 편협한 시선은, 반드시 바뀌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넓은 은혜를 경험하면, 우리의 죽어가는 영혼이 다시 소생케 됨을, 분명히 발견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너는 누구를 미워하고 있느냐?”  “너는 누구를 포기했느냐?”  “너는 누구에게,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제한하고 있느냐?”  우리가, 우리의 모든 고집과 편협한 생각, 그리고 이기적 욕심을 겸손히 내려놓고, 이제는 겸허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된다라면, 우리의 악한 생각과 마음이, 반드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운 시선이, 이제는 교회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며, 우리 주변의 이웃들을 소생케 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을 새롭게 살릴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

요나서는 열린 결말로 끝이 납니다.  솔직히, 요나가 회개했는지, 끝까지 고집을 부렸는지, 성경은 자세히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제 그 결말이, 우리의 삶으로 이어져, 쓰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너는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느냐?”  “너는 누구를 향해 분노하고 있느냐?”  “너는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느냐?”

 

우리가 만약, 요나와 같은 편협한 생각과 시선에만 머물고 있다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며, 뜻하시는, 그분의 뜻과 나라를 전혀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새롭게 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이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옳다라는 확신을, 점점 더 키워 니가는 교만과 아집의 과정이 아닌, 긍휼함과 겸손함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묵묵히 닮아 가는, 낮아짐의 과정임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정죄의 시선이 긍휼의 시선으로, 미움의 시선이 사랑의 시선으로, 편견의 시선이 복음의 시선으로 바뀌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매순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고 실천하는, 참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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