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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2 / 회복의 은혜! (미가 5:2~5a)

오늘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예배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여러분들은 뉴스를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국어 사전에 보면, 뉴스를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과 사고를, 보도의 틀에 맞추어 재구성한 이야기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뉴스들을 가만히 보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보다, 떠들썩하고 놀라운 여러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이나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사건 사고들을, 좀더 부풀려 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청률이 자신들의 영향력과 동시에 재정적인 수입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방송사들 마다 자신들이 독점적으로 취재하여 알리는 특종이 있으니, 꼭 관심을 가지고 시청해달라고 광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세상의 화려한 스포트 라잇을 받는 곳이 아닌,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곳에서, 놀라운 사건 하나가 일어나게 될 것임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작은 시골마을인 베들레헴으로써, 이곳은 그 동안 수많은 전쟁과 파괴, 멸망과 함락이라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잘 것 없는 곳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이 자라날 것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이기에, 오늘 본문 말씀은, 베들레헴을 뉴스의 중심에 두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첫째로, 이 작은 땅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왕이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라는 명칭은, 베들레헴과 에브라다의 두 단어가 결합된 명칭입니다.  성경을 보면, 종종 이렇게 결합된 명칭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베들레헴이라는 지역이, 오직 한곳이 아닌, 여러 곳에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는 몽고메리 카운티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주변 가까이에 살고 있는 분들은 잘 아시지만, 혹시라도 서부나 남부에 사는 분들에게, 우리 교회가 몽고메리 카운티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몽고메리 카운티가 메릴랜드에도 있고, 알라바마에도,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주에도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펜실베니아 몽고메리 카운티라고 이야기를 하면, 정확하게 우리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베들레헴 에브라다는 특정한 지역에 있는 베들레헴을 가리키기 위한 명칭이 되고 있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그 당시 인구가 천명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그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를 십만명 정도로 추측을 하는데, 이에 비하면 베들레헴은 100분의 1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었던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직전을 보면, 이곳보다 휠씬 큰 예루살렘 성은 적들에게 포위를 당했고, 그로 인하여 이들은 멸시와 수치를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예루살렘성이 원수들에게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미가 선지자는 아무로 주목하지 않는 땅, 바로 작고 연약한 베들레헴 지역을 바라보며, 장치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오게 될 것이라 예언을 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이 같은 미가 선지자의 선포는,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했을 것입니다.  즉, 힘 있고, 능력이 있으며, 유수한 인재들이 많이 모인 예루살렘이 아닌, 그 누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초라한 베들레헴에서, 장차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같은 미가 선지자의 선포는, 하나님께서 장차 행하실 일은, 사람의 기준이나 혹은 세상적 관점, 다시 말해, 세상에서 영향력이 있고, 특별한 힘을 가진 사람이나 혹은 강력한 군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뛰어 넘으시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는, 세속적인 권위나 명예 그리고 힘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가 아닌, 작고 비천한 낮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겸손의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 자가에 죽으심이라.”

 

따라서, 장차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다스리실 그 나라는, 무력이나 경제력을 이용하여, 세상의 논리나 혹은 강압적인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 아닌, 오직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하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통치하는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이나 방법, 그리고 다양한 장소와 여러 겸손한 사람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바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 땅,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그 초라한 베들레헴과 같은 곳에서, 자신의 놀라운 일을 예비하시고, 계획하시며, 이루어 가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베들레헴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그곳에는 절대로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장소가 있지 않으십니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계획과 방법으로, 오늘도 우리 삶 속에 찾아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세속적인 방법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지금도 위대한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비록, 세상의 놀라운 성공을 이룬 사람들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이 작고 초라한 우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 한명 한명의 삶에 찾아오셔서, 장차 새로운 생명을 살리고, 그러한 생명을 이어 나가는 놀라운 일에, 우리를 사용하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전하고 행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임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만 간직하는 것이 아닌, 세상을 향해 기쁜 소식으로 전하고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베들레헴에 위엄 있는 왕으로 임하신다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낮고, 작으며, 초라한 땅에,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습니다.  그렇기에, 누가 보아도, 인간 예수님은 힘없고 연약한 갈대처럼 보였습니다.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면, 꺼질 듯한 촛불과 같은 모습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나약하지 않으셨습니다.  평범한 우리들과 같이 약하지 않으셨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러한 메시야를,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는 모습으로 묘사하였습니다.  또한, 그 분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능력을 소유한 분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장차 우리에게 임하실 메시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자기 백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부족함 없이 충족시켜 주실 분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야께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임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때, 그 나라는 “땅끝까지 미치게 된다”라고, 미가 선지자는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문득 이러한 생각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믿으며 오늘을 살아갈까?  그리고 만약 그들이 무언가를 믿고 있다면, 그 믿음의 대상아 과연 그들의 삶에 능력이 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무언가를 믿는다고 할 때, 그 대상이 모래성과 같이 쉽게 무너진다라면, 그것은 참된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대상이 허망하면, 그 믿음도 자연히 허망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까지 믿고 살아가야 할 대상은, 쉽게 변하거나, 혹은 변덕이 심하거나, 나약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떠한 것에도 변하지 않는, 단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반드시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과연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느냐?’는, 우리 인생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끝까지 믿고 살아가야 할 대상은, 메시야로서,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환난 날에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는 분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모든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셨음이라.”

 

또한,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실 때,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라고, 마태복음 10장 1절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그리고, 과거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이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설교를 하게 되었을 때, 삼 천명이나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사도행전 2:41절은 생생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도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의 힘과 능력을 통해, 하나님이 뜻하시고 계획하신 일에 동참하여, 이 모든 것들을 온전히 이룰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게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기다리고 대망하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분만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을 완성하는 길로 이끄실 생명의 목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그분을 믿고, 신뢰하며,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나의 판단과 생각으로 행하는 내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기준을 가지고, 그분의 뜻과 방법 안에서, 그 분이 원하시는 믿음을 통해 신앙 생활을 이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 그리고 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놀라운 능력과 은혜의 힘으로,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사명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비록 세상의 기준에 우리가 하찮고 보잘것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과 삶을 통해, 우리 안에 역사하고 계신 위대한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하는, 참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은 베들레헴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다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절이, 메시야의 사역과 그가 다스리는 왕국의 번영에 대해서 묘사했다면, 이제 마지막 5절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누리게 될, 평강에 대해서 강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강”이라는 단어는, 이제 메시야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다스리심으로 주어지는, 안정과 평온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빌립보서 2장 9절과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모두 그 이름 앞에 복종할 것이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같이, 전 우주적인 힘을 가진 분이, 장차 다스리실 왕국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샬롬”인 것입니다.  살롬이라는 단어의 뜻을 우리 말로 번역해 보면, 평화,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 등을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메시야가 다스리는 나라는, 전쟁과 폭력, 억압과 압제, 불평등과 불균형, 미움이나 다툼, 시기와 질투가 없고, 오직 존중과 배려, 다름과 차이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를 서로가 존중할 수 있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더 이상 갈등과 반목이 아니라, 서로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존중과 배려가 있습니다.  상하 강압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하나됨의 평화가 있습니다.  비교와 열등 의식이 사라지고, 낮은 자존감이 사라지며, 우리 모두의 존재 자체가, 그 무엇보다 귀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걸작품으로 인정해 주는 나라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온전하게 구현되는 나라, 그래서 갈등이 없고, 아픔과 상처가 없고, 믿음으로 복을 누리는 나라가 다름아닌, 재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다스릴 나라인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나라의 모습을, 이사야 11장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죽은 이후에만, 갈 수 있는 나라이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임하였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다만, 아직 우리의 욕심과 죄악된 마음으로 인하여, 그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이 같은 나라가 분명히 완성될 것임을 강조하며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얼마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이 곳에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된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올라갈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의 현실적 사정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바라보며, 이같이 말문을 열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그 앉은 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필라제일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

믿음은, 그저 이해하고 동의하는 마음의 결단을 넘어서, 우리 삶의 실제적 누림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누리지 못하는 믿음은, 마치 행함이 없는 믿음과 같이 헛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말씀하였고, 로마서 1장 16절에서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되고 있습니까?  또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선물이, 우리 삶의 기쁨과 감사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보내 주신 이유는, 바로 그를 믿고, 그 믿음으로 자유하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 그리고 그로 인한 구원이 그 참된 목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비록 작은 땅 베들레헴, 초라하고 주목받지 못한 이곳, 바로 실패와 절망 그리고 낙담으로 얼룩진 그곳에 찾아오셨듯, 오늘도 우리 삶의 초라하고, 나약하며, 실패한 그 곳에 친히 찾아오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치 삭개오에게 말씀 하셨던 것과 같이,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연약하고 나약하며 죄로 가득한 모습 속에, 친히 거하실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온전히 인도하며, 세워주시겠다 약속하고 계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도록, 이끄시겠다고 새로운 도전과 비전을 전하고 계십니다.

 

대림절의 마지막 주간, 이 같은 메시아의 오심을 통해, 우리의 삶이 새롭게 변화되고 회복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실패감이 사라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늘 승리하는 거룩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슬픔과 아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고, 찬송이 되는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매 순간 순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평강이 임하여, 하늘의 소망이 늘 가득한 은혜가 임하기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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